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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은 아무나 하나/ 최강 스테파노신부
작성자오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21 조회수524 추천수13 반대(0) 신고



요즘 들어 나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다시 사랑이 화두가 되고 있다. 나쁘지 않다.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존재감과 뭔가를 나눌 수 있다는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으니까. 나는 그런 존재감과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나눠주는 사랑에 대해 내 친구들과 더 깊이 생각해 보고 더 깊이 묵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싶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나도 모르게 사랑에 빠져서 황홀해 하거나, 아니면 지극히 고통스러워하다 보니 이미 사랑은 저만치 멀리 떠나갔더라! 하지만 이런 식의 진술은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나와 너, 그리고 나와 세상 사이의 관계에서 피어나는 최고로 아름다운 인간적 행위의 지극히 감상적인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사랑을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하는 감정의 상태로만 이해를 한다면 사랑 안에서 우리들의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것은 비참하리만치 작아진다.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서 나도 모르게 멀어져가는 사랑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우리가 여전히 ‘사랑은 받는 것’이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내가 사랑의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는 없을까?

또 어떤 사람들은 흔히 하소연한다. 사랑하고 싶어 죽겠는데 내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 도대체 내 주위에는 없다!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랑할 대상의 부재를 하소연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사랑을 단순한 인간적, 성적 친밀감 정도로 이해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특정의 대상이 눈에 띄어서 뇌 속에서 부지런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고 마침내 ‘사랑에 빠진다’ 하더라도 초기의 인간적 매력이나 성적 흥분이 사그라지면 곧 권태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둥 사랑하고 싶어 죽겠는데 내가 사랑할 만한 대상이 없다며 또다시 하소연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내게 외로워죽겠다는 하소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은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그래서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이다. 사랑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찾지 못해서 사랑하기를 원하는 데도 못하고 있는 배타적이고 패쇄적인 관계의 설정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내가 나 자신과 내 친구들과 세상을 대하는 열려있는 존재의 상태이다. 그래서 아무나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에 대해서 잘 배우고 익혀야 한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배우고 익혀서 비로소 가능한 차원을 완전히 넘어선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우리들에게 신적 사랑의 깊이를 가늠케 해 준다. 아이들은 가장 먼저 어머니의 사랑을 잘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래서 성숙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격발달 정도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 성숙한 사랑은 겸손함, 자상함, 용기, 희생, 봉사, 책임 등과 같은 인간적 가치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찾아진다. 성숙한 사랑은 지식보다는 지혜를 가진 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다.

성숙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면서 행복해 한다. 진정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지금 당장 당신이 부와 권력을 잡기 위해 기울이고 있는 노력만큼, 당신의 겉모습을 치장하는 데에 공을 들이는 만큼, 아니 그 반만큼이라도 당신의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줄 수 있는 것이 고작 몇 푼의 돈이나 섹시한 몸뚱이와 같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에 머무른다면 이는 너무 가볍지 않은가. 만약 당신이 진지한 자세로 상대방과 함께 만들어 가고픈 아름다운 세상에 대해 들려준다면 상대방은 당신에게 자신의 영혼을 담은 노래를 불러줄 것이다.

성숙한 사랑은 상대의 사랑을 배타적이고 패쇄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성숙한 사랑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즐거운 일치감을 체험하면서도 언제나 다른 모든 사람들과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개방되어 있다.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말은 상대방에게 의존하는 존재의 상태를 이르는 말이 아니다. 이 말 뜻은 오히려 서로가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상대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사랑의 일치로 착각해서는 결코 그 소유를 오래 지속시키지 못함을 확인할 뿐이다. 사랑할수록 우리는 그 사랑의 힘을 바탕으로 다른 모든 사람과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사랑의 창조력이자 생산력이다. 그러므로 소유가 아닌 진정한 사랑에는 적당한 간격이 필요하다. 더 깊은 사랑일수록, 더 오래 간직하고 싶은 사랑일수록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더 넓은 간격이 필요하다. 사랑할수록 서로 가까워져서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커져 가기만 하는데 사랑할수록 멀어지라는 것으로 들리는 이 말을 사람들이 언뜻 들어서는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하다. 사랑은 오래 간직하고 싶은 그 만큼 적당한 간격을 필요로 한다. 저 만치 떨어져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듯 신비로운 눈빛으로 상대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모든 사랑에 대한 화려한 서술들에 앞서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해 전제되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아직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성숙한 사랑으로 타인에게 다가가기란 불가능하다. 사랑은 특정의 대상에 대한 특별한 감상이라기보다는 우리들 존재의 상태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서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다.

사랑은 다 차려진 밥상머리에 앉아 수고 없이 밥을 퍼먹는 것이 아니다. 밥을 퍼먹고 나서 포만감에 젖어 배를 두드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정성스레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밥상을 차리는 행위이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나와 너와 세상을 향해 정성껏 준비하는 밥상이요, 그 밥상을 차리는 과정이다.

어느 날 문득 다 차려진 밥상이 내 앞에 다가왔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밥상이 사라진 다음 배는 불렀는가? 아니다. 그러면 네가 본 밥상은 환상이다.

몇 날 며칠을 정성들여 밥상을 지었는데 함께 먹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배고파하며 그 밥상머리에 앉고 싶어 했지만 그들은 내가 함께 밥을 먹고 싶은 타잎이 아니었다. 네 밥상은 식어버렸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많이 고민하고 많이 묵상하고 많이 배워야 한다. 예수의 말씀을 들어라. 예수의 사랑을 배워라.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3)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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