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우리가 모르는 또다른 언어가 있습니다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21 조회수546 추천수4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세상에는 소통의 통로가 많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말로 하는 소통이 있으며 그 밖에도 몸으로 하는 소통도 있으며 노래,
춤, 그림, 시 등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그것이 또 다른 언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말이 표준어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지랄입니다. 사전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함부로 법석을 떨거나 분별없이 막 하는 짓'을 욕으로 이르는 말.
<지랄병>의 준말.

우리는 보통 이웃이 나에게 상식 이하의 행동이나 말을 하면 지랄병하네라고
말하며 그가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제가 달라진 것이 바로 이 부분임을 나누려고합니다.

저는 항상 그가 하는 지랄이 저를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기에
저 자신만 힘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그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미움의 끝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비참한 것임을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주님을 만나고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 지랄은 또다른 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신체 중에 어디가 탈나면 고치라고 통증으로 신호를 줍니다.
만약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썩어가는 병중에 하나가 한센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통증은 축복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날 지랄도 그와같이 축복일 수 있다고 느끼고 그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 것입니다. 그가 말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나를 힘들게 하려고 지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아파서 고쳐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몸이 아파서 통증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가 그랬듯이 사람은 영혼이 아플때도 그렇게 반응함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 마음이 아프거든, 네 위로가 필요하거든, 네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거든"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또 다른 언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그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그를 미워하게 되고 미움의 끝을 보게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귀가 열려 지금까지 듣지 못하던 말이 들리자 달라지는 것은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사랑은 이해가 바탕에 깔리지 않고서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언어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다는 것은 가슴이 열리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어느 한 기관이 막히면 소통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농부의 딸이라서 한가지는 압니다.
가믐이 들어서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농부는 논의 한 귀퉁이를 팝니다.
농부가 손만대어 물꼬만 틔어주면 자연스레 물이 논으로 흘러들어가 죽어가던
벼들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병든 사람들을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몸이 병들면 마음도 병들고,
마음이 병들면 몸도 병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가 하는 지랄이 살려는 신호로 또 다른 말로 들리자 달라진 마음은
왜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었고 어떤 방법으로 도와주어 할런지는
알지 못하지만 우선 내 마음이 그를 이해하고 있으니 그에게 거칠게 반응하지
않고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 안에서 사랑은 자연스레 싹이 튼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미움의 끝까지 살아본 못난 사람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못난이를 끝까지 참고 이해하고 기다려주신 주님의 사랑에 진심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후기:
제가 살던 동네에는 길고양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고양이들이 골목에 내 놓은 쓰레기봉투를 뜯어서 항상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또 다른 언어를 알아 듣자 길고양이들의 모습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항상 나를 괴롭히는 없어져야 되는 원수 같던 고양이들이
"아, 너희들 밥 먹으러 왔구나!"로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밥 먹으러 온 것이고 그러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나를 힘들고 화나게 하려고 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배고픈 길고양이가 밥 먹으로 와서 한 행동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듯이 우리는
이웃의 상식 밖의 이상한 행동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볼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것은 살고 싶다는 또다른 언어의 표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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