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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기 비움과 자기 양도 식별 [모든것 버림의 분별]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22 조회수409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리스도교의 신비신학에 의하면(한 저자의 저술) 그리스도교의 자기 버림과 불교의 자기 비움이 과연 만날 수 있을까를 묻고 (자문하면서)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신비주의자들의 '무'는 불교의 '공'과 어떤 점에서는 합치되어질 수도 있다고 서술한다. 

이 저자는 그리스도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 버림'의 최고 절정이다며 불교의 깨달음 역시 '자기 비움'의 최고 절정으로써 각각 '무'와 '공'은 그리스도교의 구원과 불교의 피안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강생은 하느님의 자기 비움이고, 그분의 십자가에서 마침내 자기 비움의 완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오늘의 복음에서도 살펴보면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라고 나온다. 뿐만아니라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하고 예수님께 묻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며 말씀하신다. (복음서 참조)

사실 불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솔직히 없다. 다만 저자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불교의 가르침에서도 (아시아 종교 포함)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의 자기 버림, 자기 비움('무')은 불교의 자기 비움, 버림('공)과 전혀 다르지는 않는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다음의 말씀도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복음서 참조) 저자는 예수님의 자기 비움은 하느님의 자기 비움과 연결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성부의 자기 비움이 성자의 자기 비움의 근원이다'고 한다.

예수님의 강생이 그와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마찬가지로 의미를 둔다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교가 마치 불교에서 파생되어져 나온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 아니다면 하느님의 진리가 다른 종교에서도 어렴풋이 찾아보게 된다는 교회 가르침을 상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저술)는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가 모두 자기 비움, 자기 버림, 자기 포기('무'와 '공')에 집중해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을 확실히 할 뿐이다고 생각한다. 말씀께서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에게서 오심은 오직 하느님의 자기 비움이라고 한정해서 말할 수는 없다. 저자는 하느님의 자기 비움에 의해서 사람도 마침내 신격화되어진다고 결론적으로 그렇게 언급하기도 한다.  

자기 비움, 자기 버림이라는 틀(무와 공)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신비신학이 불교 신앙에 접속되어 신앙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고 본다. 본인은 그런 측면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불교는 경전의 종교로써 지식의 힘에 의한 인식의 각성(깨달음)이라면 그리스도교는 경전의 종교가 아니라 삼위하느님 은총의 힘에 의한 말씀이 열리는 '말씀'의 종교이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자기 비움으로 부처가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도 자기 비움으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인간 정신(지적능력)의 힘에 의지하여 지혜 절정의 피안, 깨달음에 도달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인간 지식, 논리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그리스도)인 은총에 의지해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지혜에 참여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말씀에 초대되어 말씀과 결합하면 예수님의 강생은 자기 비움에 한정되는게 아니고 사람이 되신 말씀은 '하느님의 자기 양도'로 보아진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인간의 언어로 계시하셨다. 그 계시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사람과 결합하신 은총으로써 하느님(말씀) 자신의 "내어 주심"이다. 말씀의 종교, 즉 '하느님의 자기 양도'이다.

말씀과 결합하는 이들은 불교처럼 인간의 힘에 의해서 말씀과 결합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자기 양도라는 측면은 오직 하느님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이지 인간 자신이 하느님(말씀)을 선택하고 말씀을 결정하는 것이 결단코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 당신자신의 "내어 주심"은 또한 하느님의 사랑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며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1요한서 참조)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먼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기 양도, "내어 주심"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 자신이신 말씀을 사람에게 "내어 주심"이다. 

자기 버림, 자기 비움과는 다른 차원이다. 자기 비움, 자기 버림은 글자 그대로와 같이 자기가 없슴이 아니다. 자기가 없다면 어떻게 하느님께서 하느님 자신을 사람에게 하느님 당신을 "내어 주실" 수 있겠는가 할 것이다. 성체성혈도 예수님이 없슴이 아니다. 예수님이신 것이다. 곧 하느님의 자기 양도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심"이다 하겠다. 

성경 말씀 속의 그리스도교 자기 비움과 자기 버림은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자기 양도로써 하느님의 사랑이시다. 말씀과의 결합은 하느님의 사랑이신 것이다. 따라서 성체성사적인 삶으로 하느님께 각자 자신을 봉헌(자기 십자가)드리는 "내어 주는 사랑"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말씀의 사람은 이미 사랑 안에서 말씀과 결합되어져 있다 할 것이다. 




<계 속>

복음에서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과 '자기 버림'은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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