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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이 지겨울 때/ 최강 스테파노신부
작성자오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28 조회수565 추천수11 반대(0) 신고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워 중국어와 씨름을 하다보면 아무 생각 없이 들어도 그 의미가 가슴 속 깊이 와 닿는 조용한 한국 음악을 듣는 것이 아주 행복하다. 해가 막 기울어져 어둑어둑해 질 무렵 제법 쌀쌀한 날씨 속으로 산책을 나섰다. 집 앞 길가에 줄지어 서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 잎들이 가을을 들려주고 있을 때 내 귀에는 ‘옛사랑’이라는 노래가 다소 무의미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그런데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들 사이를 거의 다 빠져나갈 때쯤 들려온 노랫말 한 소절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왜 그리 갑자기 가슴이 매어오던지......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내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고 있던 터였다. 사랑이라는 것이,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좀 지겹다고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러고 있을 때 마침 어느 가수가 갑자기 그 노랫말을 뱉어내자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 놓은 비밀을 들켜버린 듯 당황스런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눈 안 가득 그렁그렁해 진 것이다. 의당 사랑이 삶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해야 할 신부가 사랑이 지겹다니 이게 웬 말인가.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요즘 사랑이 지겹다. 사랑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도 지겹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 지겨워진 이유는 내가 그 동안 사랑에 대해서 떠들어 댔던 언어들이 실제 사랑이 피고 지는 현장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힘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만 거듭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결국 사랑 앞에 서서 매번 사랑을 배신하는 내 생각과 말과 행위가 지겨워졌다는 뜻이리라.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리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표현해 놔도,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리 몇 날 며칠을 고뇌한 끝에 답이라 내 놓아도 그 놈이 가지고 있는 관계적 주관성 앞에서는 아무런 맥을 못 춘다.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라는 것은 어차피 ‘너’라는 타자他者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나’의 주관적인 행위이다. 사랑은 ‘너’와 ‘나’가 살아서 움직이듯이 똑같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만약 ‘너’라는 대상이 바뀌기라도 하면 그것은 그 이전의 것과는 전혀 색다른 모습과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관계 안에서의 변화무상變化無常한 사랑의 본질이 또한 나로 하여금 사랑에 대한 말도, 생각도 이제는 지겹다는 느낌이 들도록 만든다.

사랑은 ‘너’와 ‘나’라는 두 개의 세계가 만나서 하나의 관계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어느 한 쪽이라도 관계를 지속시켜 나가려는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잃어버리면 나머지 한 쪽의 지향과는 상관없이 과정 전체가 멈춰버린다. 여기서 말하는 관계의 지속을 위한 생명력은 바로 ‘너’와 ‘나’의 서로를 향한 ‘자기 개방 (self-opening)’과 서로를 위한 ‘자기 수여 (self-impartation)’에서 나온다. 이렇게 생명력을 잃고 멈춰버린 관계는 곧 지겹게 느껴진다. 지겨워진 관계는 온기를 잃고 서서히 식어간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주검 같은 관계 앞에서 아무리 후회를 하거나 화를 내 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사랑이 지겹지 않으려면 너와 내가 똑같이 살아서 움직이면서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스스로를 개방하고 스스로를 내어주어야 한다. 결국 사랑이 지겹다는 말은 서로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지도 않고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느껴질 때 쓰는 말이다.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 쉽지 않은 이유는 이렇게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하나의 관계를 이뤄가고자 동의하는 첫 순간부터 그 이후에 따르는 일치의 전 과정에 걸쳐 양쪽이 함께 개방과 수여의 과정을 끊임없이 주고 받아야 하는데 이는 사실 상대를 먼저 배려하려는 대단한 희생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의 관계를 이루어가려는 자기의지의 표현으로서의 사랑은 비단 개인과 개인의 만남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인도 공동체도 모두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지속적으로 표현해야 하고 그에 따르는 개방과 자기 수여의 행위들을 끊임없이 주고받아야 한다. 이러한 교류가 원활하게 이뤄지는 공동체 일수록 개인은 건전하고 건강한 분위기의 공동체 안에서 또 공동체는 충실한 개인들로 인해 서로 발전을 거듭해 나갈 수 있다.

사랑의 그 대상이 한 개인이나 하나의 공동체와 같은 특정의 대상이 아니라 불특정의 다수 혹은 하느님과 같은 초월적,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불특정의 다수를 향한 보편적인 사랑이거나 신을 향한 초월적인 사랑은 내가 상대를 향해 개방하고 수여하는 만큼 상대 역시 나를 위해 존재하고 내 사랑의 행위에 섬세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며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편적인 대상으로서의 사람들과 세상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의 올바른 관계를 맺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나를 건강하게 개방시키고 나 자신을 용기 있게 내어놓는 행위를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한 자신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과 세상 그리고 하느님의 보호와 사랑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정성스런 시선으로 사람들과 세상 그리고 하느님을 관찰해야 한다. 그런 존재와 행위와 대한 응시와 자각이 모든 공부의 시작이 된다.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내 맘에 고독이 너무 흘러 넘쳐.”

이 곳 중국에 와서 혼자 살아가고 있다는 이유로 마치 당연히 그래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과 세상으로 향한 마음을 닫고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내 마음 속에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고 자기 혼자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슨 그리운 사랑이 남아있을까. 혼자 지내는 일에 적응하는 일도 벅차다 핑계 삼으면서 사람들과 세상에 나를 나누어주려는 행위라고는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요즘 나는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도, 그에 대한 생각들도 지겹다고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런 내 마음 속에 저 노랫말이 울려 퍼진 것이다. 친구들과 세상에 부끄럽고, 하느님께 죄송스런 마음에 가슴이 그토록 매어지듯 아팠다. 내 맘에 내가 너무 흘러넘칠 때 사랑이란 건 이토록 지겨울 때도 있다.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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