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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짜 아팠다니까 /최강 스테파노신부
작성자오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29 조회수577 추천수13 반대(0) 신고




아침 일찍부터 청소를 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평상시에도 대충 어질러놓고 편하게 사는 스타일은 못 돼서 특별히 치워야만 할 일이 많이 쌓여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세심하게 정성을 들여 집 안을 더 깨끗하게 하고 싶었다. 둘째 누나가 볼 일이 있어 베이징에 잠깐 들리게 되었는데 그 참에 이 곳 스자좡에도 다녀가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예전 같았으면 형제 중의 한 사람이 오는데 무슨 쓸고 닦고 할 일이 있었을까마는 언제 부턴가 생각이 달라졌다. 다른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일도 혼자 사는 막내 동생을 보는 둘째 누나의 시선에는 모든 것이 짠하게만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다음부터다. 형제들 중에 유별나게 정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이제 제법 나이가 든 동생이 타향에서 혼자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도 둘째 누나의 측은지심은 이미 발동을 하고도 남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둘째 누나가 잠깐 들렀다 가는 동안만큼은 특별히 깨끗하게 잘 해놓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밥을 지을 때마다 허연 밥물을 토해내서 자기 몸통을 더럽혀 놓는 밥통은 젓가락 끝에 행주를 꽂아서 홈이 파인 데마다 구석구석 닦아놓았다. 양쪽이 서로 잘 맞물리지 않아서 항상 반쯤 열려있는 싱크대 문은 이참에 아예 투명 테이프로 봉해버렸다. 때가 꼬장꼬장 낀 소파를 덮어놓은 꽃무늬 천은 팽팽하게 당겨놓고, 아무리 청소를 해도 이상한 냄새가 가시지 않는 화장실에는 오렌지 향이 나는 방향제를 사다가 변기 뒤 보이지 않는 구석에 놓아두었다. 방충망에 끼어있는 해 묵은 먼지도 물을 뿌려가며 털어내고 휴지통도 깨끗하게 닦아놓았다. 내가 이렇게 유난을 떠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는 특별히 정이 많은 누나가 동생 사는 모습을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여러 가지 손해를 보는 일이 자꾸 생기는 데도 자신의 다정한 천성을 꿋꿋하게 지켜가는 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다하고 싶어서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어렸을 때 누나가 내게 보여 준 형제적 신의에 대해 이번 기회에 꼭 보답을 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렸을 적 누나가 내게 보여줬던 형제적 신의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어렸을 때부터 타고 난 다정한 성격으로 내가 아직 갓 난 아이였을 때 나를 업어보고 싶어서 일부러 어머니가 안보는 틈을 타 내 허벅지를 살짝 꼬집고는 내가 ‘앙’하고 울음을 터뜨리면 어머니께 달려가서 자기가 업어서 달래겠다고 졸랐다는 둘째 누나. 그 누나와 얽힌 아주 어릴 적 기억 하나가 있는데 지금도 가끔 그 이야기가 화제가 되면 나는 그 일에 대한 나의 결백을 주장한다. 둘째 누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리 강인한 체력을 타고 태어나지 못했던지 종종 감기에 걸려 학교에 결석을 하는 날이 있었다. 그렇게 누나가 학교에 가지 못하고 방에 누워있던 날만 되면 이상하게도 나는 복통에 시달렸다. 멀쩡히 책가방을 짊어지고 나서다가도 나란히 걸어서 등교를 하던 누나가 누워있으면 나도 따라서 멀쩡한 배가 아파오는 것이었다. 떼굴떼굴 뒹굴면서 누나 옆으로 기어가 바짝 붙어 누워있으면 어머니께서 보시고 ‘우리 강이도 오늘 학교 못가겠네?’라고 하시며 빙긋이 웃으셨다. 어린 마음에 아들이 배가 아파 죽는다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빙긋이 웃으시는 어머니가 혹시 계모가 아닐까 잠깐 고민을 했던 적도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누나랑 둘이 나란히 누워있으면 조금 있다가 어머니가 만화책을 열 댓 권정도 빌려다 주셨는데 이상하게도 만화책을 보다보면 배가 씻은 듯 낫곤 했었다. 자기 옆에 누워서 키킥 거리며 만화를 보고 있는 나를 보고 둘째 누나는 맨 날 나에게 ‘너 배 아프다는 거 거짓말이지? 엄마한테 안 이를 테니까 나한테만 말해봐!’하면서 나를 위협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애가 학교에 가려는 일념으로 아침밥을 급히 먹다가 체한 것이 따뜻한 방바닥에 배를 붙이고 누워있으니까 서서히 나은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데 왜 그때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아까는 진짜 아팠다니까'만 연발했는지. 그러면 누나는 그런 나를 보고 한참을 웃다가 한마디 멋진 멘트를 날리곤 했다. “알았어. 만화보자.” 나는 지금까지도 이렇게 형제적 신의로 똘똘 뭉친 짧고 굵은 한마디를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그럴 때마다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이렇게 멋진 형제적 신의에 언젠가는 꼭 보답을 하겠노라는......

그렇게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누나가 젊은 청년 장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린 뒤로 우리는 아버지의 최후의 시간들을 함께 보낸 이외에 더 이상 같은 세상을 접하면서 살지 못했다. 그렇게 서로의 앞만 바라보면서 바쁘게 살아오다가 얼마 전 중국으로 떠나오기 전에서야 둘 다 사십대가 되어 다시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가끔씩 전화 통화를 하기도 했고 잠깐씩 얼굴을 보기는 했었지만 그때는 서로가 자기 사는 이야기만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그것은 대화라기보다는 둘이 만난 자리에서 각자 자기 사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독백에 가까운 것이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독백이 시끄럽게 교차하는 것, 그것은 대화가 아니다.

그런데 몇 달 전 중국으로 떠나오기 전 둘째 누나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누나는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때로는 깔깔거리면서 웃다가 때로는 곧 눈물을 콱 쏟아낼 것처럼 슬퍼하고 이내 진지해졌다가 또 밝아지고...... 이런저런 인생의 풍랑을 겪고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된 누나의 연륜에다가 천성적으로 다정다감한 성격이 잘 어울러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깊이 있게 집중을 하고 또 말하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천성적으로 다정다감한 성품을 타고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다.

하지만 둘째 누나는 바로 그 타고난 다정한 성격으로 인하여 그 동안 많이 힘들었고 때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런 날들을 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런 날들이 너무 힘들어서 원래 자신의 성격과는 전혀 다르게 시퍼런 날을 세운 칼날처럼 날카롭게 살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자신의 타고난 천성을 거스르는 불편함으로 인하여 평화로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다시 자신의 천성으로 돌아왔을 때의 그 편안함을 이제는 포기할 수가 없다고 했다. 더군다나 그 편안함은 자신 스스로 뿐만이 아니라 자기와 관계하는 사람들이 모든 이들이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니 그 발견이 너무 놀라웠다고 했다.

찰라와 같이 빠르게 스쳐가는 젊은 시절을 지나 온 한 중년의 인간이 자신과 주변을 널리 평화롭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발견한 것이 바로 자신의 천성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천성을 깨닫고 매일 매일 새롭게 계발해 나가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공부가 있을까?

이제 스자좡 역으로 둘째 누나를 마중 나가야 할 시간이다. 집도 깨끗이 쓸고 닦아 놨겠다, 오늘 저녁은 평생을 같이 살아 온 친구를 대하듯 누나와 대화를 나누며 보내야겠다. 누나가 내일 아침 또 먼 길을 기쁘게 떠날 수 있도록 할 겸, 다정한 천성을 잘 갈고 닦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한 인간에 대한 예의도 갖출 겸,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 누나가 보여 준 놀라운 형제적 신의에 대해 보답도 할 겸 저녁은 손수 준비를 하고 싶었는데 이 글을 쓰고 앉아있느라 준비해 놓은 식재료들을 손질도 못했다. 오늘 또 먼 길 달려온 누나만 고생시키게 생겼다. 아니다. 오늘 같은 날은 누나가 틀림없이 반대를 할 테지만 억지로라도 밖으로 모시고 나가서 양고기 구이를 대접해 드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자신의 천성을 왜곡시키지 않고 잘 갈고 닦아서 자신과 주변을 평화롭고 따뜻하게 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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