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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윗의 불륜, 그 이후~~~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29 조회수402 추천수4 반대(0) 신고

 

독서: 2사무 12,1-7ㄷ.10-17
 

 

(어제에 이어 계속~~~)

 

 

하느님께서 나탄을 다윗에게 보내 그의 죄를 꾸짖자

다윗이 나탄에게 고백을 했어.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했지.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하셨다면서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어.

나탄은 다윗과 밧 세바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죽고 말 것이라고 예언을 했으니까. 
그러고나서 정말 그 아이는 큰 병이 들어.

다윗은 아이에게 화가 미치는 것을 막고자 단식을 하며 눈물로 기도했지만 소용이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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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질문이 있어~~~

참 이상해~~ 

다윗이 죄를 지었으면 다윗 혼자 벌을 받게 하지

왜 죄없는 아이는 데려가시는 거지?

 

 

그것은 바로 죄의 속성 때문이야.

죄지은 당사자만 용서받았다고, 또는 처벌 받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

죄라는 놈의 속성은 죄지은 그 순간부터 이미 그 영향이 다른 곳으로 확산되어 가.

마치 다윗과 밧  세바가 저지른 죄가 그 두 사람의 행위로 끝나지 않고, 아기가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야.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아무 죄도 없는 다윗의 아이를 데려가는  것은

다윗이 저지른 죄의 결과까지 깨끗이 치워주신 셈이 되는 거야.

우리 눈엔 비록 비정해보여도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은 다윗을 새롭게 일으키셔.

 

게다가 사실 무고한 부하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뺏은 무뢰배가 그만큼의 희생도 없이

한 마디의 고백만으로 그 큰 죄를 용서받았다고 한다면,

힘없는 백성들은 하느님의 정의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어?

그런 뻔뻔한 통치자를 어떻게 임금이라고 섬길 수 있겠어?

 

 

 

 

 

갑자기 칸느 영화제 수상작 이창동 감독의 '밀양'(secret sunshine)이라는 영화가 생각이 나.

신애(전도연)는 남편이 죽자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와 어린 아들과 함께 살아.

그런데 낯선 땅에서 젊은 과부로 살아가려니, 무시당할것 같아 돈이 많은 것처럼 허세를 부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아들이 유괴 당해 살해되는 불행을 맞게 돼.

신애는 이웃의 권유로 교회를 찾아가고 가까스로 신앙생활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아.

 

그러던 어느 날 신애가 용기를 내어 살인자를 용서하려고 교도소를 찾아가.

그런데 이게 왠일? 살인범은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했다고 하며 평안히 미소를 지어.

그 모습을 본 신애는 냉랭히 굳어져서 돌아와.

그리고는 교회에 가서 장궤틀을 부서져라 뚜드리며 울부짖어.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를 용서할 수 있느냐' 고 하면서.

신애는 결국 교회를 떠나. 아니 그렇게 성급하게 용서를 하는 하나님을 떠난 거지.

 

 

 

이게 무슨 말이겠어.

죄는 용서받더라도 벌은 받아야 한다는 거지.

죄를 용서받았어도 벌까지 면제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야.

그가 저지른 죄의 결과는 이미 누군가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야.

진정한 죄사함이란 그래서 하느님과의 일대 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이웃까지 포함한 삼자적 관계의 회복이어야 하는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세상 어떤 인간도 그 문제에 관한 한 자유로울 수가 없어.

죄짓지 않고 사는 이가 없고, 자기 죄의 결과가 어디까지 파급되었는지 알지도 못하지.

그것이 바로 벌이 너무 무겁고 가혹해서도 안 되는 이유야.

그래서 우리에게는 죄의 결과를 대신 갚기 위한 보속이 필요한 것이지. 

 

여기서 벌을 죄지은 자가 스스로 정한다면 말이 안 되듯이, 보속 역시 그래.

다윗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단식을 하며 매달렸어.

말하자면 스스로 보속을 정해서 벌을 면제하려고 하였던 거지.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용서나 처벌의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다는 거야.

그래서 죄의 용서를 선언받기 위해서도 다른 이가 필요하고,

보속을 정해주는 것도 자기 임의대로가 아니라 다른 이에게서 받아야 하는 거지.

다윗이 나탄에게서 하느님의 선언을 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사제를 통해 사죄선언과 보속을 받는 것은 그런 연유야.

 

 

 

 

 

이제 다시 다윗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다윗은 아이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어.

그리고 주님의 집에 들어가 경배하고 난 후 비로소 음식을 먹어.

 

어쩜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렇게 변하는 다윗의 모습이 이해가 안 되지만...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날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뜻이야.

 

하느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지만 결코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으셔.  

그리하여 다윗과 밧쎄바에게 새 아이를 선물하시고

그 아이를 통해 다윗의 왕권을 이어주셨지.

 

그러기에 죄를 지었다고, 더구나 죽을죄를 지었다고해도 그대로 끝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

하느님께 돌아와서 진심으로 뉘우치며 죄를 고백할 때 희망이 있다는 거지.

 

복습하면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는 아닌 것도 알았어.

우리의 죄 때문에 생긴 결과에 대해서는 보상을 하려고 노력을 해야 해.

물론 그것을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고, 안다고 해도 상응한 보상을 할 수도 없어.

 

그러나 자기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다면

네 배로 보상해주겠다고 한 자캐오처럼은 아니어도 

고해성사 때에 내려주는 가볍디 가벼운 보속마저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겠지.

 

 

 

 

ps. 결국 이 얘길 하려구 어제부터 사마귀 유치원을 흉내내어 유치하게 눈길을 끈거랍니다 ^^

        눈쌀 찌푸려졌었다면 용서~~ 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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