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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베개 두 개/ 최강 스테파노신부
작성자오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31 조회수834 추천수15 반대(0) 신고



난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나처럼 잠을 자는 동안에 적어도 서너 차례 정도는 잠에서 깨어나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 주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보통의 경우 한 번 잠이 들면 아침 자명종이 울릴 때까지 중간에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잔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 몇 시에 잠자리에 들었느냐에 상관없이 잠을 자는 동안 적어도 서너 차례는 깨어나 몇 시인지 확인도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하고, 물을 마시러 부엌에 다녀오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냥 멍하니 누워있기도 한다. 물론 어떤 날은 다시 잠들기를 포기하고 정말 이른 시간에 침대를 박차고 나오기도 한다. 중국에 오기 전 수면 내시경을 할 때 신경안정제를 보통 사람들보다 두 배 이상 주사 맞고도 잠에 빠져들지 않아서 결국은 맨 정신에 ‘욱, 욱’ 거리면서 내시경 검사를 했어야 할 정도니 잠 잘 자는 복은 나하고는 거리가 먼 셈이다.

며칠 전에도 새벽 4시가 조금 지나 잠에서 깨어났다. 몇 차례 뒤척일수록 의식이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총총해 지는 것이 다시 잠에 빠져들 낌새는 그때부터 이미 아니었다. 따뜻한 물 한 모금 마시면 다시 잘 수 있을까? 어슬렁어슬렁 부엌으로 걸어와서 불을 켰을 때 나는 자지러지듯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난 밤 설거지를 마치고 식기가 잘 마르도록 싱크대 옆에 엎어놓았었는데 그 식기들 위에서 손톱 크기의 바퀴벌레 서너 마리가 레이스를 펼치고 있었다. 그릇을 엎어놓은 곳이 보온밥통 옆이라 따뜻해서 모두 모여든 모양이었다. 어떤 놈은 아예 내 숟가락이 마치 제 집 인양 폭 파인 곳에 배를 깔고 움직일 생각도 없이 명상에 잠겨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으로 이사 온 이후 근 두 달 가까이 바퀴벌레 박멸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어느 날부터인지 눈에 띄지 않아서 나는 그 놈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이사가버린 줄로만 알고 있었던 터라서 내 놀라움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밤에는 저 놈들 놀이터로 쓰이고 낮에는 내 입으로 들고나는 수저며 그릇으로 쓰이고 있었다니...... 서둘러 주방용 티슈를 몇 칸 끊어서 생포 작전에 나섰다. 하지만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나만큼이나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달아나는 그 놈들 중에 겨우 한 마리만을 잡을 수 있었다. 주방용 티슈 속에서 바동거리는 그 놈을 꾹 눌러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혼잣말로 내뱉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그 새벽에 물을 끓여서 식기들을 한참동안 담가 놓았다. 숟가락을 꺼내서 세제를 둠뿍 발라 빡빡 소리가 나게 닦고 있는데 그 동안 이 숟가락이 내 입 속을 들락거렸다는 사실에 기분이 몹시 불쾌해졌다. 그렇게 약간 신경질이 난 채 내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갑자기 바퀴벌레만큼이나 내 신경을 다시 확 곤두세우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 개의 베개! 시장에서 구입했던 침구 한 세트에 들어있던 베개 두 개! 그 동안 별 생각 없이 하나는 머리에 베고 다른 하나는 껴안든지 혹은 다리를 올리든지 하는 용도로 써왔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새벽에 내 눈에 들어온 두 개의 베개는 내 신경에 몹시 거슬렸다. 화가 났다는 게, 아니, 갑자기 너무 외로워졌다는 것이 좀 더 직접적이고 솔직한 표현일까? 옆으로 누워서 자는 습관이 있는 내게 그 동안 꽤 유용하게 쓰였던 베개 하나가 머리에 베는 다른 베개 하나와는 저 만치 떨어진 채 덩그마니 놓여 있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소름이 끼칠 만큼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익숙해져 가던 베개 두 개가 놓여 있는 침대가 어느 한 새벽 갑자기 이토록 낯설게 느껴질 때가 또 있을까? 그 날 새벽 베개 하나를 옷장 속에 내동댕이치듯 처박아 두면서 혼잣말로 내뱉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그 뒤로 한참 동안을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었다. 기도할 맘도 일어나지 않았고 음악을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그냥 그대로 멍청하게 앉아 있는 일밖에는 다른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무 생각 없이 창문을 여는 순간 바로 옆 건물에서 세상을 다 깨우는 듯 시끄러운 폭음이 들려왔다. 화약이 터지면서 내는 요란스런 폭음은 그 후로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 폭음은 어제 저녁 장례식을 치른 어느 집에서 새벽이 오기 전 시신을 화장터로 운구하면서 온갖 잡귀를 몰아내기 위해 화약을 터뜨리는 소리였다.

아직 날도 밝지 않은 새벽에 폭죽 소리를 듣게 되자 갑자기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 또 한 분이 차안此岸의 소풍을 마치고 먼 길을 떠나가는구나. 이 캄캄한 새벽에 떠나는 길은 참 외롭겠다. 그렇게 요란한 폭죽 소리와 함께 먼 길을 떠나는 한 외로운 영혼의 아이러니가 놀랍도록 빠르게 내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맞다. 누구 하나 피해가지 못하고 언젠가는 맞이해야만 하는 저 낯선 여행길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우리들 인생이 어떻게 외로움을 비켜갈 수 있을까. 외로움은 내가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런 우리들 존재의 상태일진대 나는 어찌하여 외롭다고 말하고 있는가? 하물며 하느님과 세상과 사람들을 더욱 깊이 사랑하기 위하여 이 생을 살면서 이미 최후의 여행길을 떠난 사람이 어찌하여 외롭다고 말하고 있는가?

내가 외로운 것은 아직 길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외롭다고 말하는 것은 길을 떠났으되 여전히 뭉게구름과 같은 환상 속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너무나 소중하다. 혼자 있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에 묶여있는지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참 소중하다. 한참 동안 들려오던 화약 터지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을 때 나는 다시 평화로운 마음이 되어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오늘 미사의 지향은 저기 먼 길을 떠나는 이름 모를 중국 노인을 위하여, 이미 떠나온 여행길에 더욱 정진하는 나를 위하여,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구도자들을 위하여.

미사를 마쳤을 때 어느 새 여명은 창문까지 닿아 있었고 나는 옷장 속에 처박아 놓은 베개를 다시 꺼내어 가만히 침대에 올려놓았다. 내가 품고 자던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님의 베개’였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한 구도자와 함께 매일 밤을 보내시는 나의 님을 위한 베개!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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