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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 진리를 위해서가 아닌, 그 사랑을 위해서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31 조회수387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가 있기 때문에 그분의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삼아 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였다. 그럼 왜 '십자가를 진다'는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모든 공동체나 교회이거나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고통 속에는 죄악스런 배경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그러하겠지만 또한 죄악스런 배경과 반드시 결부시켜서 파악하게 되는 연관성도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이유에는 타인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서 그것이 오로지 병자(혹은 소외된)들만의 생명과 평화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라도 병자나 소외받는 자로써 살아가야 하는 일이 당연시 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생명과 모든 이들의
평화를 위한 그같은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이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어떤 사람의 죄악성으로 인하여 인간 고통이 계속 야기되는 것이 분명한 것은 사회(공동체, 교회 등) 안에서 자주 발생되어지는 환경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기인된다고 하여 그 환경의 원인이 되는 부정한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과 같은 이들을 진리의 이름으로 혹은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함이 마땅하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아니며, 예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도 아니다 할 것이다.

병자들과 소외된 자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죄악스런 배경과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과 공동체 모두가 회개함으로써 다시 재출발을 새롭게하기 까지 자신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진정으로 병자들과의(즉, 그들에 의한) 고통 보다도 더 심한 고통이 될 수 있다.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겪는 고통에서 또 더하여 고통을 주는 그들을 용서하면서 그들의 죄악성을 차마 진리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처단할 수 없는 것은 악을 악으로써 대하면 악이 점점 더 자라나지만, 악을 선으로 대하면 악이 악의 자리를 잃고 선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여 선이 자라나면 악을 비로소 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고통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 겪는 그리스도적인 고통이 있는가 하면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면서 사랑의 힘으로 생명과 평화에 이르는 그리스도적인 고통이 또한 있는 것이다. 이 둘이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 몸으로 짊어지는 온전한 십자가의 길이다 하겠다

이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악을 파멸시키는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지혜인 것이다. 영적인 전쟁은 '진리 안에서의 사랑'이다. 진리가 바로 사랑이다. 다른 진리로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 사랑이 하느님의 정의이고 하느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의 살과 피이다.

가난한 자들의 구원과 해방을 위한 그 진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구원과 생명을 위한 진리 안에서 그 사랑을 위하여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적인 고통의 십자가는 그와같다고 분명히 믿는다며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 진리에 헌신하다 떠나는 형제님께 주님의 평화와 축복을 빌면서 기도드린다>





<교리서 164> 신앙은 시련에 처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흔히, 신앙이 우리에게 보장해 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한다. 악과 고통, 불의와 죽음의 경험은 ‘기쁜 소식’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며, 때로 신앙을 흔들기도 하고, 유혹이 될 수도 있다.  
 
<교리서 272>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악이나 고통의 체험을 통하여 시련에 놓일 수도 있다. 때때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처럼, 하느님께서 악을 막을 수 없으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의 자기 낮춤과 부활 안에서 당신의 전능을 신비하게 드러내시고, 그 낮춤과 부활을 통하여 악을 이기셨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이시다. “  
 
<교리서 309> 만일 질서 있고 선한 세계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계시다면 어째서 악이 존재하는가- 절박하고도 피할 수 없으며, 고통스럽고도 신비한 이 질문에 그 어떤 성급한 대답도 충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 자유로이 응할 수 있는 인간을 행복한 삶에 초대함으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이 그 답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두려운 신비 때문에 이 초대를 회피할 수도 있다.  
 
<교리서 311> 하느님께서는 결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윤리적 악의 원인일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의 자유를 존중하여 악을 허락하시는 것이며, 신비로운 방식으로 악에서 선을 끌어내신다. /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최상의 선이시므로, 만일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실 충분한 능력과 선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면, 당신의 피조물들 안에 어떠한 악도 존재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다.  
 
<교리서 312> 악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충만한 은총으로154) 그리스도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을 끌어내셨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교리서 324> 하느님께서 물리적 악과 윤리적 악을 허락하시는 것은 신비이다. 이 신비는 악을 물리치려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밝혀진다. 만일 영원한 생명 안에서만 완전히 깨닫게 될 그러한 길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악에서조차 선을 끌어내지 않으신다면 악을 허락하실 리 없다는 것을 우리는 신앙으로 확신한다.  
 
<교리서 385>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사랑의 계시는 만연되어 있는 악과 동시에 넘쳐흐르는 은총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의 기원 문제를 숙고할 때, 악을 홀로 정복하신 그분께 우리 신앙의 눈길을 고정시켜야 한다.  
 
<교리서 385>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사랑의 계시는 만연되어 있는 악과 동시에 넘쳐흐르는 은총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의 기원 문제를 숙고할 때, 악을 홀로 정복하신 그분께 우리 신앙의 눈길을 고정시켜야 한다. <<<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사랑의 계시는 만연되어 있는 악과 동시에 넘쳐흐르는 은총을 보여 준다" >>>  
 
<교리서 412> “그리스도의 형언할 수 없는 은총은 마귀가 질투로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310) 그리고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도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죄를 지은 이후에도 더 높은 목적을 향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더 큰 선을 이루어 내시고자 악을 허락하신다. 이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라고 말했다.  
 
<교리서> 인간은 자신 안에서 분열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인간의 모든 삶은 개인 생활이든 사회생활이든 참으로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극적인 투쟁으로 드러난다. <교리서 2284> 악한 표양(스캔들)은 악을 저지르도록 타인을 이끄는 태도나 행위이다. 악한 표양을 보이는 사람은 이웃을 악으로 이끄는 유혹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덕과 정의에 해를 끼침으로써, 그의 형제를 영적 죽음으로 이끌어 들일 수 있다.  
 
<교리서 2285> 악한 표양은, 그것을 보이는 사람의 권위나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의 약함 때문에 특별한 중대성을 띠게 된다. 이 악한 표양은 우리 주님께 다음과 같은 저주를 불러일으켰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마태 18,6). <교리서 2287>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자기가 조장한 악에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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