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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 2.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01 조회수573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1.2.1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사무 하24,2.9-17 마르6.1-6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사촌 노(老) 형님이 선물한 90세에 그린 긴 항해 후 귀항하여 갯벌위에

걸치듯 누어있는 배 그림을 보며 문득 ‘아, 형님은 외로웠구나.

저 배는 바로 노년의 형님의 모습을 상징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깨달음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림을 통한 아름다움의 추구는

그대로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느님을 찾는 일입니다.


중반 이후 그림을 통해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느님을 찾은 형님이셨습니다.

 

외로워서 사람입니다.

외로워서 하느님을 찾습니다.

외로움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하느님을 찾는 일뿐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하느님을 찾는 구도자입니다.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오늘 시편 성무일도 중 마음에 와 닿은 말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만이 외로움을 충만한 기쁨으로 바꿉니다.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꿉니다.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

 


이 시편 구절 역시 제가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땅의 현실에 빠져 살지 말고

때로 멈추고 눈 들어 하늘을,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여 분도회의 모토는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하늘보고 땅보고, 하느님보고 사람보고,

관상하고 활동하고, 늘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불행은 하늘을, 하느님을 잊어 일어납니다.


주님을 보고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주님 향한 눈길을 놓치는 순간

물에 빠진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분명해집니다.

독서의 다윗과 복음의 예수님이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하늘을, 하느님을 잊었기에 죄를 범한 다윗입니다.

바로 믿음 부족의 반영입니다.


순간 유혹에 빠져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어

인구조사를 한 것이 주님의 눈에 거슬린 것입니다.

 


하느님을 잊을 때 사람은 돈으로 보이고 쓸모의 실용적 관점에서

사람을 대하게 되는 것 바로 이게 인간 현실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자마자 즉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사죄하는 다윗입니다.

 


“제가 이런 짓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당신 종의 죄악을 없애주십시오.

제가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다윗의 매력은 즉각적인 회개에 있습니다.

저 또한 다윗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누구나의 유혹이 현실적 이해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잊는 순간 다윗은 유혹에 빠져

현실적 이해관계를 계산해 본 것입니다.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는, 또 군대에 징집할 수 있는 백성은

얼마나 되는가 알아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누구나의 가능성인데 이게 왜 죄가 되는가 싶기도 합니다.

 

저는 다윗을 통해서 저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공동체나 나의 현실만을 바라볼 때

온갖 부정적 상념이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불만스럽고 부족한 단점들이 많이 눈에 띠고 실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이리저리 불만으로 떼어버리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늘을, 하느님을 잊고

공동체만을 자신만을 바라봤을 때 겪는 공통체험입니다.

 

고작 우월감의 교만 아니면 열등감의 자기비하일 것입니다.

이럴 때 마다 저는 즉시 눈을 들어 하느님을 보며 저의 불신을 뉘우칩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마 다윗의 심정이 이렇지 않았겠나 생각됩니다.

 



순전히 자기만을, 공동체의 현실만을, 세상 현실만을 바라보면

실망이나 좌절이지만 하느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넘치고 힘이 샘솟습니다.

마음 또한 너그럽고 자비로워집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가 내 눈을 하느님 눈으로 바꿉니다.

내 눈으로 볼 때는 불평불만이지만

하느님 눈으로 볼 때는 감사와 겸손입니다.



하느님은 다윗을 크게 쓰시고자 엄중한 벌을 통해 그를 깨우치십니다.

왜 다윗이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깊은 사랑과 신뢰를 받았는지 다음 대목에서 잘 들어납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치십시오.”

 



주님은 회개하는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회개의 모범, 지도자의 모범이 다윗입니다.

애당초 좋은 믿음은 없습니다.

이런 회개의 여정을 통해 더욱 깊어진 다윗의 하느님 믿음입니다.

 


다윗은 유혹에 넘어가 실패했지만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성공했습니다.

결코 세상 사람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고향 사람들을 하나 탓하시지 않고

한 말씀만 남기시고 미련 없이 초연히 떠나십니다.

 


인간의 내적현실을 깊이 통찰하신 지혜로우신 주님이십니다.

사실 선입견에 따른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우리의 보편적 현실이요,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일컬어

원죄라 칭하는지도 모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이 말씀만 남기시고 이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워하시며

표표히 떠나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시며 가르치십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보아주든 말든

세상의 반응에 일희일비,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않으시고

하느님만 바라보며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하십니다.

 


하느님을 바라볼 때는 희망과 빛이지만

세상 현실이나 나의 내적 현실만을 바라볼 때는 실망이요 어둠입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그 눈으로 세상을, 공동체를,

나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이래야 희망과 빛, 감사와 겸손의 삶입니다.

 




매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눈길을 당신의 눈길로 바꿔주시어

감사와 겸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살게 하십니다.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편34,9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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