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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생이라는 시험/최강 스테파노신부
작성자오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03 조회수727 추천수16 반대(0) 신고



한 주간 동안 허베이 사범대학에서 중국어 시험을 치렀다. 로마에서 학위심사를 마치고 동료들이 소감을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던 게 생각난다. “특별한 소감은 없고 앞으로는 적어도 학업에 관련된 시험은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하지만 나는 첫 날 ‘중국어 열독’ 시험을 치르는 때부터 줄 곧 이 말을 머릿속에서 되뇌면서 다시 시험지에 머리를 처박고 낑낑대고 있어야만 했다. 인생 자체가 시험의 연속인데 어딜 어떻게 비켜 가느냐고? 글쎄! 시험 자체를 비켜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시험인데 마흔이 훌쩍 넘은 이때까지 학과 시험을 치르고 있는 나는 뭐냐고?

사실 나는 시험 치는 것을 힘들어 하는 편은 아니다. 나처럼 시험에 대해서 스트레스 없이 사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신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부터 나는 나만의 시험에 관한 원칙을 몇 가지 정해 놓았다. 그 중 제일 중요한 한 가지가 ‘시험 당일 해가 뜬 뒤로는 책을 잡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평소보다 더 느긋하게 커피도 마시고 조간신문도 여유 있게 읽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시험장에 갈 때가 되면 언제나 펜 한 자루만 들고 가서 맨 앞자리에 앉았다. 연신 침을 발라가며 이리 저리 부산하게 책을 넘기고 있던 다른 신학생들의 눈에는 펜 하나 달랑 들고 와서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고 앉아있는 내가 약간 기이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시험 치르기 하루 전까지만 열심히 준비를 하자는 원칙을 꾸준히 지켜왔다. 시험 당일까지 부산을 떨며 초조하게 앉아 있으면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이미 내가 시험이라는 놈에게 기가 눌린 느낌이 들어서 싫었다.

또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모르는 것은 기꺼이 빈 칸으로 남겨두라’는 것이다. 답안지를 채우지 못해서 빈 칸으로 제출해야 할 때 드는 그 찝찝한 기분은 누구나 몇 차례씩 경험이 있을 법하다.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는 문제에 얼렁뚱땅 몇 마디라도 끼적여서 제출을 하게 되는데 출제자는 금방 알 수 있다. 단답형이나 사지선답형 시험문제라면 모를까, ‘신의 존재증명’과 같이 결론에 해당하는 명제를 미리 전해 놓고 그것을 지지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펼쳐나가야 하는 논증방식의 시험은 시험 문제를 받는 순간 이미 본인이 이를 타파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그러니 정해진 시험 시간 동안 자기가 모르는 문제에 집착하여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문제에 정성을 들이는 편이 여러모로 유익하다. 설령 모르는 문제가 출제되었다면 과감하게 빈 칸으로 남긴 채 답안지를 제출하는 것이 좋다. 그 빈 칸을 보면서 오히려 여러 가지를 배우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중국어 시험은 지금까지 내가 치른 시험 중에서 가장 편하게 치른 시험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만큼 이번 시험을 치르면서 얻는 깨달음이 크다.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서 내가 몇 번째인지를 따지는 것도, 몇 점 이상을 취득해야만 상급 과정으로 승급할 수 있다는 당락의 문제도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다. 해당 대학에서는 자료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자신으로서는 그저 순수하게 내 중국어 실력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확인해 보는 기회로 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애초에 경쟁자가 없으니 경쟁을 할 필요도 없었고, 애초에 당락에도 관심이 없었으니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내 실력을 과장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아는 것은 아는 것,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확실히 모르는 문제는 어설프게 빈 칸을 메워서 요행수를 바라는 것 보다는 그냥 빈 칸으로 비워두고 한참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저런 것을 배웠다. 답안지의 빈 칸들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만약 우리들 인생이 계속되는 시험의 연속에 비유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인생이라는 시험’도 이번 중국어 시험과 같이 치러내고 싶다. 나는 우리들의 인생이 나 이외의 수많은 경쟁자들을 상대로 벌이는 ‘죽거나 혹은 죽이거나’ 식의 경합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우리들이 인생이 어떤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 ‘성공이냐, 실패냐’를 가름하는 당락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들 인생은 그 연속되는 시험을 통해서 ‘내가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지?’, ‘나는 어디로 그리고 어떻게 가야하는지?’ 등등을 스스로 배우고 깨우쳐 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들 인생에서 시험이라고 여겨지는 순간이 오면 그때는 오히려 그러한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인생의 시험을 통해서 스스로가 어디에 있는 지를 깨닫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그 길을 끊임없이 찾아 나설 수 있다면 그 인생은 평화롭다.

우리들 인생을 수많은 이웃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전쟁터로 생각한다면 그 인생이 결코 평화로울 수 없다. 우리들 인생이 어떤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 성공이나, 혹은 실패로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외부적인 조건을 이루기 위해 내면의 문제들에는 소홀하기 마련이다. 그 어떤 외부적인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서 누릴 수 있는 평화는 없다. 우리들 인생은 결코 이웃들과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 바로 그 이웃들과 함께 평화롭게 손을 잡고 완성을 향해 걸어가는 행진이다. 우리들 인생은 결코 외부적인 조건의 충족에 의해 성공의 여부를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성공한 인생이라는 것도, 실패한 인생이라는 것도 없다. 그저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해서 배우고 깨달아가면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인생이라는 시험을 치를 때도 역시 내가 그 동안 시험에 관해 가지고 있던 두 가지 원칙을 지키고 싶다. 첫째, 여유롭게 치르고 싶다. 매일을 긴장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맞이하면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매번 인생이라는 시험이 내게 다가올 때마다 그 무게에 눌리는 마음, 그 사나운 기세에 쫒기는 마음 보다는 좀 더 여유롭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그 시험들을 대하고 싶다. 아무리 어려운 시험 앞에 서더라도 차 한 잔 마시면서 바람도 맞고, 별도 보고, 새가 우는 소리도 들으면서 그 문제들을 풀어가고 싶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우리들 내면에 그 해답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여유는 평상시의 성실한 삶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둘째, 빈 칸으로 남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초등학생 수학 문제도 아니고, 한 평생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점 실수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모르는 문제,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운 문제들은 차라리 빈 칸으로 남겨 놓은 채 다음 문제로 과감히 넘어가고 싶다. 모르는 문제를 아는 척하면서 거드름 피우고 앉아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이야기고, 또 그 모르는 문제에 이러쿵저러쿵 잡다한 답변들까지 어지럽게 늘어놓는 것은 사기 치는 것이고.

우리들의 전 인생을 통해 반복되는 세상과 사람들에 연계된 시험들을 통해 보다 더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스스로의 존재 가치들을 끊임없이 배우고 깨달아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과 함께 세상 안에서 조화롭게 표현하며 살아가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들에게 허락된 이 생명의 참 된 목표가 아닐까? 그토록 초조해하고 긴장한 채 바쁘게, 바쁘게 어디론지를 향해 달려가는 삶들의 중간에 우뚝 서서 누군가 ‘제발 멈춰!’하고 지르는 고함이 될 수는 없을까?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 우두커니 서있는 사람들에게 또 다시 누군가가 한 가지 물음이 되어줄 수는 없을까? “도대체 어디로 그리 바삐들 가시오?”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는 중세 수도자들을 위해 쓴 ‘훈화집’을 통해 다음과 같은 고함소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숙고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염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이 우리를 성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을 성스럽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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