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양심의 가책이 증거하는 것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03 조회수805 추천수10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2년 나해 연중 제4주간 금요일 -
양심의 가책이 증거하는 것
 
 



 


사람이 죄짓고는 못삽니다. 해결치 못한 죄책감은 병을 불러 옵니다. 실화입니다. 한 여인이 빨간 차만 보면 두드러기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빨간 색의 차만 보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후에 결국 그 원인이 밝혀졌는데, 신혼 초에 남편이 징집 갔을 때 외간 남자와 불륜 관계를 맺었습니다. 물론 관계는 그 한번으로 끝났고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 후 그 일이 마음에 걸리었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그 일을 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그 일이 무마되고 마음속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빨간 차면 보면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정신 신체 상관성 질환(psycho- somatic- illness)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참조: daum 블로그, YoonTube)
 

현대인의 앓고 있는 질병의 85%가 정신 신체 상관성 질환이라고 합니다. 마치 상하지 않은 우유를 마시게 한 다음 상한 것이었다고 말하면 몇 명은 정말 식중독 증세를 보여 토하고 몸에 두드러기가 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내 안에 정신적인 죄책감이 있기 때문에 신체적으로도 문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즘 동유럽에서는 60여명이 추위로 숨지고 일본에서도 50여명이 눈 때문에 사망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50년만의 강추위를 맞고 있습니다. 이는 지구 온난화 때문에 북쪽의 찬 공기를 막아주지 못해 그것이 밑으로 많이 내려왔기 때문이랍니다. 결국 원인 없이 일어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빨간 차를 보면 두드러기가 나는 원인은 무엇 때문일까요? 자기 스스로 잘못을 범했다는 것을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보통 ‘양심의 가책’이라고 부릅니다. 
양심은 라틴어로 [con-scientia]인데, 이는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지식’이란 뜻입니다. 절대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세상사람 모두를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의 양심은 속일 수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양심은 잘못을 하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얼마 동안 꾸준히 월요일 아침에 밥을 먹으러 가던 식당에 며칠 동안 가지 않았습니다. 성당에 다니라고 해도 나오려 하시지 않는 무신론자이십니다. 나중에 한 번 갔더니 그 자매님은 자신이 제가 마지막으로 갔을 때 찬밥을 데워 준 것을 눈치 채고 기분이 나빠 안 오시는 줄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찬밥을 데워주신 것도 몰랐습니다. 정말 큰 문제는 그 분은 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양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자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믿으며 비이성적으로 행동을 합니다. 만약 양심의 가책이 없었다면 자신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자신에게 보복을 할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양심이 있기에 자신의 잘못에 대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것이고 물론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양심은 이렇게 잘 한 것과 잘못 한 것을 심판합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심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후천적으로 교육을 받아서 그렇게 자신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양심의 가책은 이성적으로 극복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성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고 이성보다 더 깊은 곳에 박혀있는 본성입니다.
 

지옥이란 것을 보고 온 성인들, 특히 가타리나 성녀나 파우스티나 성녀와 같은 분들은 지옥의 가장 큰 고통은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이고 두 번째 큰 고통은 ‘양심의 가책’이라고 합니다. 
‘왜 하느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을까? 왜 성당에 나오지 않았을까? 왜 죄를 짓고 고해성사를 보지 않았을까? ...’라고 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꾸짖는 것입니다. 이 양심의 가책이 자신을 갉아먹는 벌레처럼 지옥에서 영원히 영혼을 괴롭힌다고 합니다.헤로데도 이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를 보면서 자신이 죽인 요한이 살아났다고 헛소리를 할 정도로 이상해 진 이유가 바로 ‘양심의 가책’ 때문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양심이란 것이 인간 안에 있다고 믿는다면 그 옳고 그름을 아시는 법 자체이신 분이 계시고 또 그 절대윤리로서 인간을 심판하게 될 것도 당연히 믿어야 할 것입니다. 동물들이나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는 아기들을 재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재판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꽃에는 반드시 아름다움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삶에도 선하고 악함이 반드시 존재하고 양심이란 것이 그것을 심판해 줍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해주는 양심이 있다면, 당연히 그 옳고 그름에 대한 심판도 존재할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양심을 넣어주신 분의 심판이 없다고 믿는다면 양심대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헤로데처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두려움 속에서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약 양심이 있다고 믿는다면 양심대로 살아가십시오. 양심의 심판으로 인한 가책으로 괴로워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양심의 심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양심을 따르는 것이 그것을 넣어주신 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파우스티나 성녀는 지옥에 있는 대부분이 사람들이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이들이라고 하는데, 저는 지옥에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부정하지 못하면서도 양심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