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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좀머'씨의 외침/최강 스테파노신부
작성자오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04 조회수541 추천수10 반대(0) 신고



“그러니 나를 제발 좀 그냥 놔두세요!”

이 말은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üskind)가 쓴『좀머씨 이야기』(Die Geschichte von Herrn Sommer)라는 책에 등장하는 ‘좀머’가 세상을 향해서 내뱉는 일갈一喝이다. 이 책 속에서 좀머는 일년 365일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호주 마을 주변 이 곳 저 곳을 무작정 걸어 다닌다. 세 번 걸음을 옮긴 후에 지팡이를 한 번 찍는 그의 등에는 언제나 텅 빈 배낭이 매달려 있다. 마을 사람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가 왜 그렇게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는지, 어디를 향해 걸어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행여 누군가가 그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재촉하기 때문이다. 그런 좀머가 딱 한 번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갑자기 커다란 우박까지 쏟아져 내리던 어느 여름날, 비에 흠뻑 젖은 채 여전히 길을 걸어가는 좀머에게 이 책의 화자話者인 소년의 아버지가 걱정스런 나머지 ‘그러다가 죽겠다’며 어서 차에 타라고 권한 바로 그때였다. 좀머는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춰 서더니 답답하고 절망적인 몸짓으로 지팡이로 땅을 내려치며 소리친다. “그러니 나를 제발 좀 그냥 놔두세요!”

꽤 오래 전에 읽었던 이 ‘좀머의 외침’이 갑자기 떠올랐다. 주일 미사를 마치고 장갑과 목도리, 그리고 두꺼운 외투로 중무장을 한 채 길을 나선 때였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길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들려오는 폭죽 터지는 소리, “쾅콰콰쾅!”. 폭죽이 터지면서 생기는 진동에 길 가에 주차되어 있던 차들의 도난 방지 장치가 자동으로 작동되면서 생기는 소리, “왱왱왱왱왱......”. 거리는 온통 인파와 화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중국인들의 최대 명절인 ‘춘절’을 하루 앞 둔 거리의 표정이다. 지금쯤이면 한국의 풍경 역시 설을 쇠기 위해 고향을 찾은 사람들로 온통 북적일 테지만 이곳에 비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아직도 많은 것이 낯선 이방인의 눈에 중국 사람들이 춘절을 보내는 모습은 그야말로 전쟁을 방불케 한다. 그렇게 요란한 길 위를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좀머의 외침은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만약에 좀머가 이 길을 걸어야 했다면 좀 더 빨리 호수로 향해 마지막 걸음을 걸었을지도 모르겠는 걸? 하하하”

중국말을 배우고 있는 허베이 사범대학이 방학을 한 뒤부터 나는 좀 더 부지런히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좀머처럼 하루 온 종일 걸어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목적지가 없이 그냥 마음이 내키는 대로 방향을 이리 저리 바꿔가며 한참을 걸어 다닌다. 정해 진 목적지도 없이, 정해 진 시간도 없이 그냥 발길이 닿는 대로,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가지 걸어 다니다 보면 ‘참 편하고 자유롭다’라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어느 정해 진 목적지를, 정해 진 시간 안에 가야만 할 때 드는 초조함은 애초에 없다. 또 그 곳에서 어떤 목적을 달성하거나, 혹은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드는 성취감이나 허무함 같은 것도 없다. 목적지가 없는 길을 걷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 편하고 자유롭다’는 느낌으로 행할 수 있다.

그렇게 목적지가 없는 길을 걷다보면 평상시에는 잘 보지 못하고, 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어서 또한 좋다. 몇 차례 길 위에서 눈인사만 나눴던 집 근처 ‘81 중학’에 다니는 학생들과 한참 동안 수다를 떨기도 하고, 가는 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할아버지들의 진지한 장기판에도 기웃거린다. 할머니들의 마작판은 비교적 소란스럽고 ‘저놈이 누군가?’하는 경계의 눈초리가 하도 심해서 빠르게 지나친다. 길 위의 이발사들은 꼭 몇몇이 함께 모여 있는데 서로 경쟁을 하는 처지일 텐데도 어찌나 사이가 좋은지 신기할 정도다. 집에서 약 30분 정도를 동쪽으로 걸어가면 과일장수들이 모여 있는 과전골목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골목을 걷다보면 마치 시간을 거꾸로 걸어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도시 중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만큼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 길의 끝부분쯤에 도달하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길옆의 텃밭에서 엉덩이를 깐 채 똥을 싸고 있는 할아버지들의 모습도 가끔 보게 된다. 도시의 아스팔트 바닥에서 그런 모습을 보면 기겁을 하게 되겠지만 길 옆 텃밭의 그런 풍경이라면 뭐 어때.

방향을 바꿔서 서쪽을 향해 걸으면 스자좡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허베이성 박물관과 기차역 방향인데 이쪽은 현재를 향해 돌아오는 느낌이 들게 한다. 거리 곳곳에 넘쳐나는 사람들과 차량들로 어지러운 곳이지만 그 ‘카오스’ 속을 걷노라면 목적지 없는 나의 이 발걸음이 상대적으로 더욱 가볍고 경쾌하게 느껴져서 좋은 점이 있다. 그 무수한 발걸음들 속에 서 있으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경부선 고속도로 어느 몹시 분주한 휴게소 주차장에서 내게 들려주시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된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저렇게 자기 코앞의 목적지만 보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데, 만약 저 사람들이 자기들 역시 머지않아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목적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아마 훨씬 덜 바쁘게 살아갈 거야.”

북쪽으로는 쉴 새 없이 매연을 뿜어대는 공장들이 즐비해서 잘 가지 않는다. 높은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는 공중에서 단 몇 초도 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파란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공기오염이 심한 이곳 사정을 생각하면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내 곁에서 존재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함께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남쪽으로 삼십분 정도를 걸어가면 아주 넓은 공원이 있다. 이 공원 안에서는 요즘 세상의 속도감을 떨쳐버리고 그야말로 천천히 걸을 수 있다. 쌍쌍이 짝을 지어 데이트를 즐기는 젋은 커플들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팽이 곡예나 태극권을 연습하는 노인들도, 이 공원 안에서는 누구 하나 서두르는 사람이 없다. 반듯하게 줄을 맞춰 서서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노인들의 태극권 연마를 한참 구경하고 서 있다 보면 ‘옛날에는 시간이 저런 속도로 흘렀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춘절을 하루 앞 둔 오늘은 동서남북 어디를 가나 길이 너무 복잡해서 평상시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졌다. 한 시간 남짓이나 걸었을 때쯤 문득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니 언제든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가던 길을 멈추고 발길을 돌리면 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주로 집을 나설 때 걸었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는데도 가만히 보면 주변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이 줄어있어서 여기 저기 눈길이 가는 곳이 적다. 그 대신 땅을 보고 걸으면서 이런 저런 더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고개를 땅에 파묻은 채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내 발걸음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내 인생이라는 길 위에 서 있는 나 역시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닫게 된다.

뚜렷한 목적지가 없이 길을 걷다보면 참 편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들어서 좋다. 어느 방향을 선택하든지 이리 저리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다닐 수가 있다. 천천히 혹은 조금 빠르게, 어느 템포라도 자기 맘 내키는 대로 걸으면 된다. 하지만 재밌는 볼거리들을 놓치거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네지도 못할 정도로 빨리 걸을 필요는 없다. 빨리 걸으면 빨리 걷는 만큼 일찍 쉬어야 한다. 다른 누군가가 방향을 미리 정해 놓고 그리로 가라고 강요할 수도 없고, 시간을 정해 놓고 빨리 가라고 강요하지도 않으니 그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 다니면 그만이다. 혹시 누군가가 이리저리 방향을 강요하거나 시간을 재촉하거든 가던 발길을 멈추고 지팡이로 ‘쿵쿵’ 땅을 몇 번 두드리며 소리칠 수 있다.

“제발 좀 나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어가는 그 길의 끝이 어디인지, 또 언제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어차피 우리들의 발걸음은 ‘집’을 향해 돌아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을 너는 무엇하러 재촉하고 있는가 말이다. 너는 왜 네가 원하는 방향대로만 걸어가라고 강요하고 있는가 말이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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