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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창조의 협력자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04 조회수565 추천수8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2년 나해 연중 제5주일 - 창조의 협력자






 

그리스∙로마 신화나 동양 신화에서나 모두 세상의 창조는 혼돈과 무질서에서 시작하여 질서에로 나아간다는 것에는 맥락을 같이 합니다.

동양의 혼돈 신의 이름은 다리 여섯과 날개 넷이 달린 ‘제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괴물은 머리가 없습니다. 아마 고대 사람들도 다리의 힘과 날개의 민첩함을 다 갖추고 있더라도 보고 듣고 생각하여 명령을 내리는 머리가 없으면 그 자체가 곧 혼돈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곧 창조의 완성임을 알게 됩니다. 어쨌든 이 제강이란 신은 춤을 잘 추고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합니다. 춤과 음악은 바로 우주의 역동적인 힘, 에너지를 형성화 한 것입니다. 그러나 춤이 음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음악이 소음이 되어버리면 그것이 바로 에너지만 있는 혼돈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제강’의 모습은 힘은 있지만 질서가 없는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카오스’의 실체를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세상을 창조해 낸 신의 이름을 ‘반고’라고 부릅니다. 그는 거인이었고 혼돈 속에서 하늘과 땅이 분리되면서 탄생했지만 음∙양의 에너지를 나타내는 ‘태극’을 양 손에 쥐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분리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질서가 잡혀간다는 시작의 의미도 있지만, 태극의 모양에서 보듯이 ‘음기와 양기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는 거대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동양 음양 이론도 우리 신학과 잘 맞는데, 아담과 하와로부터 모든 인류가 나왔듯이, 그리스도와 마리아로부터 새로운 인류가 창조된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반고라는 거인은 1만 8천 년 동안 살다가 죽게 되는데 온 몸이 변화되어 세상 만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두 눈은 해와 달로 변했고, 피부의 살은 흙으로 변했고, 뼈는 돌과 금속으로 변했고, 피는 강과 바다로 변했고, 머리카락은 초목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이런 거인신체화생 신화는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부분을 많이 지니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인도의 뿌루샤(Purusa)라는 거인을 신들이 죽여 4부분으로 나누어 새로운 불멸의 존재들을 만듭니다. 북유럽에는 이미르(Ymir)라는 신을 젊은 신들의 대장인 오딘(Odin)이 죽여 토막을 내어 그 조각들로 세상의 사물을 만들어냅니다.

사람이 우주의 모든 복잡함을 담고 있다고 해서 인간을 ‘소우주’라 부릅니다. 우리나라 동의보감에서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의 눈은 해야 달의 정기로부터 온 것이고, 우리의 뼈는 광물이나 산과 바다의 정기로부터 온 것이고, 우리의 털은 초목의 정기로부터 왔다.”

(참조: TV특강, 정재서 교수 편)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옛 사람들의 생각에도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은 너무도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더 복잡하고 질서 잡힌 존재의 희생으로 만들어졌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온 우주뿐만 아니라 인간까지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이런 식으로 변화해 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사막에 회오리바람이 불어 모래끼리 부딪히다가 운이 좋아 나무도 만들어지고 시계도 만들어지고 동물도 만들어지고 사람도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기하면 진화론자들은 이런 예를 듭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금고를 열기 위해 10개의 숫자 조합을 맞추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자기 생전에는 그것을 맞추기 힘들지라도 오랜 시간 동안 하나를 맞추고, 그 다음에는 또 하나, 이렇게 하나씩 맞추어 가다보면 언젠가는 10개의 조합이 다 맞추어져 사람처럼 복잡한 존재가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처음 맞춘 숫자가 앞으로 생겨날 더 복잡한 존재의 조합이 무엇인지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 그 금고 번호를 맞추고 있다는 것이 전제됩니다. 우리는 이 분이 곧 창조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분이 일을 하지 않으면 번호가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어떻게 알고 다음 번호를 맞추어갈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사막에 스마트폰이 떨어져 있는데 그것이 자연의 조화로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군가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지능이 있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 곳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은 더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즉 사막에 떨어진 스마트폰은 그 사막의 모래와 조합되어 더 복잡한 무엇으로 재탄생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냥 모래알처럼 부서져 버립니다. 이것이 자연입니다.

그러나 창조는 어떤 복잡한 존재가 자신보다 덜 복잡한 무엇을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만약 어느 별에 스마트폰과 같은 복잡한 전자기기가 떨어져 있다면 그 곳엔 반드시 그것을 만들 수 있을만한 지능을 지닌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과 같이 인간 스스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복잡한 존재를 보면서 그것이 스스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성경에서도 태초에 세상은 혼돈 상태였습니다. 하느님은 6일 동안 창조를 하시고 7일째는 쉬십니다. 처음엔 빛을 만들어 어둠과 가르시고 물과 물을 가르셔서 공간을 만드시고 바다와 육지를 가르시며 식물, 해와 달과 별, 어류와 육지 동물 들을 만드시고 그 다음 사람을 만드십니다. 누가 봐도 정말 고된 노동입니다. 그래서 7일째 되는 날에 하느님께서 쉬셨다고 나옵니다.

정말 하느님께서 힘드셔서 쉬셨겠습니까? 쉰다는 의미는 자신의 힘을 다 소진했기 때문에 다시 보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지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도 쉬셨다는 의미는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일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일하지 않고서 복잡한 기계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일하지 않고 무엇 하나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한 생명을 탄생시키고 키우기 위해 사람도 얼마나 많은 힘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자녀를 낳아 키워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노력이 바로 창조하는 노력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죽어야만 했던 거인들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행위는 무엇일까요? 사람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다른 고장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주선을 수리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 우주선은 만든 사람들만이 수리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병은 육체의 고장을 의미하고 마귀는 영적으로 무질서하게 만드는 컴퓨터의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복음’이란 바로 창조자께서 세상에 오셔서 고장 난 정신과 육체를 치유해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없었던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발라 눈을 만들어주시는 장면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심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창조를 계속 하시기 위해 오셨다면 창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이 창조자께서 인간들에 의해 십자가에 처참히 죽으십니다. 그랬더니 그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옵니다. 그 피는 죄를 사함이요, 물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죄를 없애고 성령님을 부어주시는 성사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세례 성사로 죄의 사함을 받고 성령님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재창조 되었습니다. 새로 고쳐주시는 것을 넘어서서 당신을 희생하여 새로운 ‘그리스도’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재창조는 당신이 직접 세우시고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 쉬고 계십니다. 당신이 하실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창조 사업에 불림을 받았고 그 일을 마친 다음 제 7일에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창조 사업을 위해 일을 한 사람만이 안식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 창조 사업이 바로 ‘복음전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면 우리도 힘들어 분해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순교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우리의 생명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서 보듯이 우리가 바친 생명을 다시 찾고 게다가 영원한 안식에 들게 됩니다.

성경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 그리스도와 함께 쉴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분께서 하시던 복음전파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 자신을 희생하면서 복음을 전해 줄 수 있겠습니까?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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