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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모든 것은 산이 결정한다/ 최강 스테파노신부
작성자오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07 조회수673 추천수15 반대(0) 신고



허영호와 엄홍길. 이 두 사람은 세계적인 명품 산악인이다. 허영호 씨는 세계 최초로 3극지(남극, 북극, 에베레스트) 와 7대륙의 최고봉을 모두 정복한 분이다. 엄홍길 씨 역시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의 8천 미터 이상 16개 좌의 정상에 오른 분이다. 굳이 이들의 이름 앞에 ‘한국인’, 혹은 ‘한국이 낳은’ 등과 같은 수식어를 붙이지 않은 이유는 이제 우리도 이런 명품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세계인들에게 내어주고 공유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 앞에는 어떤 화려한 수식어도, 어떤 귀한 타이틀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들은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최고의 자유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그들의 본성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이 두 분을 특별히 좋아한다. 명품 산악인으로서 이룬 그들의 화려한 업적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고통 속에서 그들이 산 정상과 극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 그들의 영혼은 그들의 육신이 도달할 수 있는 곳보다 훨씬 더 높고 깊은 곳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산악인들은 에베레스트의 최고봉들을 ‘신의 영역’이라고 부른다. 오로지 신이 허락해야만 올라 설 수 있는 곳. 아마 이 두 산 사나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신의 영역에 오르면서 자주 신을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뜻밖의 조난을 당해 동료들이 죽음의 계곡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바라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의 너그러운 허락을 받아 산 정상에 올라섰을 때 그들은 분명 우리와 같은 범인들과는 다른 ‘높이’(혹은 깊이라고 해도 좋은)에서 세상을, 그리고 우리들 인생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이들의 산악 등정과 하느님의 숨결과의 일치를 위해 정진하는 우리들의 공부가 많은 면에서 닮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1924년 6월 8일, 당시 서른일곱의 나이였던 영국의 산악인 조지 말로리George Leigh Mallory 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1999년이 돼서야 발견됐다. 에베레스트 등반을 떠나기 전에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고 한다. 왜 위험을 무릅쓰고 산에 오르느냐고. 그때 그가 남긴 한 마디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Because it is there)” 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한 마디가 되었다. 산을 오르는 이들에게 산을 오르는 특별한 이유란 없다. 그들은 굳이 죽음을 무릅쓰고 산을 오르지 않더라도 평평한 땅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온갖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묵묵히 산을 오른다. 산이 있으면 오르는 본성을 타고 났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우리들의 삶도, 신앙도, 공부도 그렇다. 굳이 신의 숨결을 체험하려 사막으로 난 길을 걷지 않아도 우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오아시스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 고독한 여행을 즐겨 떠난다. 신의 초대에 보다 기꺼이 응하는 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집 앞에 펼쳐져 있는 완만한 경사의 언덕을 오른다면 모를까,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에베레스트와 같은 고봉에 오르는 산악인들은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비와 음식만을 휴대할 수 있다. 평지에 비해 공기 중의 산소량이 3분의 일에 불과한 고지대에서는 자기 몸을 부리는 일조차도 쉽지 않을 터,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신의 영역에 가 닿는 데는 방해가 될 뿐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숨결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것저것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짊어지고 ‘바늘귀’를 통과할 수는 없다. 이런저런 세상에 대한 욕심으로 무거워진 마음은 천국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은 산과 싸우지 않는다. 그들은 매서운 강풍과 송곳처럼 날카로운 얼음덩어리들, 자신들을 집어 삼킬 듯이 입을 벌리고 있는 크레바스, 그리고 깎아지른 빙벽과 싸우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 싸우며 산을 오른다. 엄홍길은 그의 수필집 『꿈을 향해 거침없이 도전하라』에서 말한다. “산을 내려와서 산을 보면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산에 오르면 그곳에는 산이 없다.” 이미 산을 오르고 있는 사람에게는 산이 없다. 산이 없는데 산과 싸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느님을 체험하고자 공부를 시작한 사람도 이와 비슷하다. 하느님과 가까워질수록 하느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 분임을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계시지 않음’이 ‘어디에도 계시지 않은 곳이 없음’을 보장한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도 하느님은 없다. 그 길은 하느님과의 싸움이 아니라 오로지 나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 중에 홀연히 드러난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공기 중의 산소량은 점점 희박해져서 호흡조차 곤란하고 체력은 고갈되기 일보직전이다. 눈보라는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추위는 뼈 속까지 파고든다.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참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신의 영역에 우뚝 선 사람들은 평지에 사는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른 높이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특혜를 가진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땅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은 진정으로 신과 대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지닌 채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살아간다. 그들은 언행에는 기품이 있다.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함으로서 마침내 하느님의 숨결 자체가 되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 역시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가는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깊이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선물을 받는다. 그들 역시 진정으로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지닌 채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의 깨달음을 세상 사람들과 나누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산이다. 산을 오르는 사람의 등반 기술이 어느 정도 고도에 이를 때까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겠지만 그들을 정상에 서게 하거나, 혹은 백여 미터를 남겨 두고 하산케 하는 것은 산이 결정한다. 산이 그들을 허락하고 길을 열어주어야만 산 사나이들은 그 산의 정상에 잠깐 올라서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하느님의 숨결이 됨으로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체험을 결정하는 것은 하느님이다.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는 스승의 가르침이나 개개인의 영적 자질이 기능을 발휘하겠지만 최후의 순간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 보이느냐, 아니면 영원히 감추느냐 하는 것은 하느님이 결정한다. 하느님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당신을 내어주셔야만 길 떠난 여행자들은 하느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잠시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래서 산의 정상에 서기 위해 떠나는 등반에 있어서도,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길에 있어서도 우리들 인간들의 차원에서 더욱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하느님의 숨결이 되기까지에 이르는 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고통과 역경에 굴하지 않고 어제보다 한 걸음 더 정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지금 그리고 여기’가 우리 삶의 행복이 피고 지는 시공時空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길을 떠나는 것, 길을 걷는 중에 만나는 세상과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뜻’이 되고자 아무 말 없이 몸뚱이를 움직이는 것, 바로 그 행위 자체가 하느님의 축복이요, 행복의 시작이다. 하느님을 향해 오르는 산행 중에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다. 오히려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가 될 뿐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일 때까지 그저 아무 말 없이 ‘떠나라’!(루카10,3) 모든 것은 산이 결정한다.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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