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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불꽃으로 살라! 최강 스테파노신부
작성자오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08 조회수811 추천수13 반대(0) 신고



며칠 전부터 다시 뒷목 부위가 무겁고 뻐근하게 느껴져서 불편을 겪고 있다. 로마에서 공부를 할 때 마지막 일 년 동안은 활동 시간의 대부분을 논문 준비한답시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보낸 탓이었는지 뒷목의 상태가 최악이었다. 그런데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불편함과 통증이 씻은 듯 사라져서 그 동안 잊고 지낼 수 있었던 것이 얼마 전부터 다시 시작된 것이다. 예전처럼 책상에 죽치고 앉아서 ‘열공’하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을 때도 어느 지상의 황제가 안 부러울 만큼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도 다시 뒷목이 뻣뻣하게 느껴진다.

다행히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허베이성 체육국에서 운영하는 성省대표 운동선수들을 위한 병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운동을 하다가 자주 다치게 되는 관절 부위나 디스크, 혹은 골절 등의 치료에 대해서는 가장 뛰어난 의술을 자랑한다는 곳이었다. 금요일 오후,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그 병원을 찾아갈 수 있었다. 외관상으로만 본다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을 정도로 낡고 어두운 분위기의 병원이었다. 게다가 병원 곳곳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운동원 우선’이라는 문귀, 얼마나 매트에 짓이겨졌는지 귓바퀴가 다 달아서 밋밋한 귀를 가진 파란색 유도복의 건장한 사내들, 그리고 아직 이른 봄인데도 이미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 여성 ‘운동원’들의 풍경은 나와 같은 일반 환자를 상대적으로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참동안 운동원들의 진료가 끝나기를 기다린 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 안에는 아직 두 명의 운동원들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둘 다 무릎에 쇠꼬챙이같이 길고 굵은 대침을 꽂은 채 누워있었는데 조그만 기계에 의해서 대침이 연달아 전기적 자극을 받고 있던 탓에 그 통나무 같은 허벅지들이 박자를 맞춰서 들썩들썩 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중국의 병원들은 양의洋醫과 중의中醫의 구분 없이 완벽한 협진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단발머리를 한 여의사 선생님이 상냥하게 내 상태를 물었고 나는 최대한 자세하게 내 목의 상태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내 말을 그리 성의 있게 듣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는데도 의사 선생님은 내 말을 중간에 딱 자르고는 몇몇 질문을 더 던진 뒤에 권위 있는 목소리로 처방을 내렸다. 한참을 설명해 주셨는데 뭐 대충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평소 좋지 않은 자세로 오래 생활을 하다 보니 목과 어깨 주위의 근육이 너무 경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경추의 변형까지 올 수도 있으니 서둘러 치료를 해야겠습니다. 일단 안마를 통해서 치료를 시도해 볼 것이고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저기 저 운동원들처럼 침술로 다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으면 좀 나을까’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온 나에게 ‘침술’이라는 단어는 두 귀가 번쩍 뚫리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전기적 자극이 가해지는 젓가락 같은 대침 서너 개를 무르팍에 사정없이 쑤셔 박아 놓은 탓에 한쪽 허벅지가 연신 들썩거리는 채로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운동원들을 내가 만약 보지 못했다면 혹시 모를까 저렇게 굵고 긴 침을 맞는다는 것은 내 용기의 한계를 넘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에게는 침술이라는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과거의 경험이 있었다.

내가 동료들과 함께 수련기를 보낼 때 인체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동양의학’이라는 과목을 수강할 때 일어난 일이다. 매 주 두 시간 정도 한의원을 운영하시는 선생님이 오셔서 기, 혈, 경락과 같은 한의학의 기본 개념 등을 설명해 주시고 가끔씩은 우리끼리 서로 짝을 지어서 사관四關, 족삼리(足三里), 인중(人中), 백회(百會) 등과 같은 기본 혈에 침을 놓는 실습을 하게 하셨다. 침을 놓아보기는커녕 맞아본 경험도 많지 않았던 내게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없는 수련생들끼리의 침술 실습은 그다지 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씁쓸한 기분으로 동양의학 과정을 거의 다 끝내가는 무렵에 선생님은 너무나 충격적인 마지막 숙제를 내주셨다. 우리 수련생들끼리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의미에서 파트너끼리 번갈아 가며 장강(長强)에 침을 놓으라는 주문이었다. 장강은 꼬리뼈와 항문 사이에 있는 혈로서 거기에 침을 맞으려면 바짝 엎드린 상태로 침을 놓는 사람에게 가장 추한 꼴을 보여야만 했다. 게다가 우리 동료들 중 하나를 ‘마루타’ 삼아서 선생님이 시범을 보일 때 10센티는 족히 될 것 같은 침이 그 민감한 곳에 다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이미 기겁을 한 상태였다. 나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끝까지 버텼지만 선생님이 얼마나 화를 내시던지 결국은 마지못해 엉덩이를 하늘로 하고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나보다 더 긴장하고 있던 동료의 덜덜덜 떨리는 손에 의해 차가운 침이 장강혈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공포와 수치스러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 혼절은 안 했지만 아무튼 그 경험이후로 나는 ‘침’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침부터 꼴깍 삼키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중국인 여의사가 다시 침 이야기를 꺼냈으니 당연히 초긴장을 할 수 밖에...... 다른 안마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의사 선생님이 직접 나를 눕히더니 목을 늘여 빼고, 주무르고, 돌리기를 한참동안 되풀이 한 뒤 내게 물었다.

“좀 어떠세요?”
“아주 좋은데요. 아주 좋아요. 어쩌면 이렇게 금방 좋아질 수가 있지요?”
“삼일 분 진료비를 미리 끊어드릴 테니 며칠 더 나오세요. 호호호.”

용수철이 튕겨지듯 재빠른 내 답변에 선생님은 만족스런 얼굴로 웃고 있었다. 물론 내가 거짓말로 괜찮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 괜찮았다. 하지만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병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질수록 점점 목이 다시 뻣뻣해 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씻은 듯 나아 보였던 목이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얼마 안돼서 원 상태로 돌아가다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내 목이 나를 속였을까? 안마를 해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침술로 다스린다는 말에 너무 놀라서 내 목이 나를 속였을까? 내가 나를?

세상 사람들은 참 많이들 속고, 속이면서 살아간다. 크게는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벌일 명분을 찾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대량살상무기’니 ‘중동의 민주화’니 떠들면서 세상을 속이는 것부터, 작게는 눈깔사탕 하나를 사기 위해 연필이며 지우개를 사야한다고 엄마를 속이려는 어린 아이의 귀여운 속임수까지 우리는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으면서 세상을 살아간다. 때로는 발각되어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원히 묻혀버리기도 한다. 뒤늦게 속은 것을 깨달은 사람은 분노의 칼을 갈면서 상대방에게 되갚아 줄 방법을 찾느라 고심한다. 만약 나를 속인 상대가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면 배신의 아픔이 더해져서 그 분노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깊어진다.

하지만 세상 그 어느 누구에게 속은 것보다도 더 나를 아프게 하고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내 자신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나 자신이고, 내 인생이다. 내가 어떻게 나에게 속을 수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를 너무나 감쪽같이 속고 속이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면서 오늘을 살아간다. “조금만 더 참고 부지런히 돈을 벌자. 머지않아 행복해질 거야.” 그리고는 돈이 나의 행복을 당연히 보장해 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결국 많은 돈을 벌어들인 사람들 대부분이 하는 일이란 너무나 시시하다. 다시 젊어지기 위해 그 동안 벌어놓은 돈을 쓰는 일이 고작이다. 젊은 시절에는 돈이 없어서 불행했었는데 돈을 벌고 나니 이제는 젊음을 잃어서 불행하다. 돈이 아니고도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나를 속이는 환상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직장에서 승진을 한다면,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간다면, 내 아이가 좋은 대학에 합격한다면, 내가 조금만 더 예뻐진다면...... 이런 외적인 조건의 변화는 우리에게 육신의 안락함을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결코 우리의 존재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는 없다. 행복은 육신의 안락한 상태가 아니라 마음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이 만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을까? 애초에 행복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가진 내가, 그러니까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의 불행쯤은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내가 평생을 두고 내 인생을 속여 온 탓이다. 하지만 불행한 오늘을 마치 희생하듯 흘러 보내면서 보장되는 내일의 행복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외적인 조건의 변화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환상에 빠지게 된다면 그때부터 환상 속의 나는 현실 속의 나를 교묘하게 속이려 들 것이고, 나는 오늘이라는 현실의 행복과는 점점 멀어진 채 내일이라는 환상 속의 행복을 좇으면서 인생을 낭비해야만 할 것이다.

행복은 항상 지금 내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이다. 우리의 인생을 바칠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작은 불꽃을 발견하고, 지키고, 마침내는 거대한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는 일 뿐이다. 만약 그 불꽃으로 살아가는 오늘이 행여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러운 일이라 해도 그것은 행복한 고통이고, 고통스러운 행복이다. 그 오늘은 결코 불행한 오늘이 될 수 없다. 그렇게 내 안의 불꽃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내 본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어주신 당신 숨결을 따라 살아갈 때 최고의 행복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불꽃으로 살라!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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