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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월12일 야곱의 우물- 마르1,40-45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12 조회수331 추천수2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40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부정과 정결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 Lectio )
오늘 말씀은 갈릴래아 전교여행의 전형적인 예로, ‘더러운 영’ 에 대한 승리 ( 마르 1,23 )와 비교되는 나병 치유사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하거니와 나병은 남 보기에 불결하고 전염이 된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고립당해 천형이라 일컬어지던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일까요 ? 그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간청합니다.( 40절 ) ‘하고자 하시면’ 이라는 청원은 예수님의 권능보다 그분의 자비에 의지하여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뜻만 있으시다면 죽은 자와 같은 처지에 놓인 자신을 치유하여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확신이자 신뢰입니다. 나병 환자의 믿음에서 나오는 청원은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 때문에 들어 허락된 보중을 받습니다.( 41절 )


성경은 모든 악성 피부질환을 나병이라 통칭합니다.( 레위 14장 ) 제1독서에서 나병 환자는 부정한 사람으로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다가오면 피해 가도록 “부정한 사람이오.” 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사회적  · 종교적으로 소외된 죽은 목숨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부정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며” 저주받은 그의 처지를 받아들여 주십니다. 이는 곧 나병 환자가 예수님 앞에 부정한 사람이 아닌 ‘나’ 라는 존재 자체로 설 수 있도록 먼저 그의 영혼을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병 환자의 간청대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41ㄴ절 )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다.” 는 나병 환자의 신뢰는 “하고자 하니” 라는 말씀으로 답을 받은 것입니다. ‘깨끗하게 되어라’ 는 말씀은 단순히 육신의 병이 없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 정화된 사람으로 사회와 종교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는, 곧 ‘죽음에서 부활한 것’ 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한테 하신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 44절 )는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예수님은 모세율법이 규정하는 율법을 준수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후 後 문맥에 이어지는 안식일 규정에 관한 것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에 의한 것이라는 이해의 기반을 놓습니다.( 2,1 – 3.6; 7,9 – 13; 12,29 – 40 참조 ) 두 번째는 ‘정화’ 입니다. 정화의 궁극적 목적은 관계의 회복에 있습니다. 사제의 공증을 받아 그는 온전한 사회 구성원이 될 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돌려보내시며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 44ㄱ절 ) 하고 굳이 함구령을 내리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유다인들은 나병 고치는 것이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에 버금가는 행위이기 때문에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로 여겼습니다.( 2열왕 5,7 참조 ) 그러므로 나병의 치유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죽은 이들의 부활과 함께 메시아 시대의 은혜로 헤아려집니다.( 마태 10,8; 11,5; 루카 7,22 참조 ) 예수님은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분명하지만, 당신의 속죄적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의 빛 안에서 당신의 신원이 밝혀지길 원했던 것입니다.( 마르 14,61 – 62; 15,2.39 참조 )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떠나가서 예수님의 권능과 말씀을 알리는 선포자가 되었습니다.( 1,45ㄱ ) 그래서 예수님은 더 이상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고 외딴곳에 머무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빛은 어디에 있든지 드러나게 마련이어서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45ㄴ절 )

묵상  ( Meditatio )

사람들은 부정不淨과 정淨의 기준을 인간의 외적인 조건에 둡니다. 보이는 곳의 질환은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혼의 내적 질환은 누가 부정하다고 진단하며, 이제는 치유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겠습니까 ? 자기 자신의 내적 상처는 곪아 터져도 ‘괜찮다. 괜찮다.’ 하고 덮어놓은 채, 이웃의 작은 상처에 골몰하여 ‘불결하다느니, 전염성이 있다느니’ 하며 부정과 정을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외적 상처의 고통으로 인해 내 이웃의 영혼이 정화되어 가고 있을 때, 깨끗하다고 자만하는 제 영혼은 불치의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 “주님, 저를 깨끗하게 해주십시오.”  ( 40절 참조 )

기도  ( Oratio )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면전에서 넘치는 기쁨을,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을 누리리이다.( 시편 16,2.11 )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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