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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빛 - 2.1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14 조회수607 추천수9 반대(0) 신고

2012.2.14 화요일

 

성 치릴로(827-869)와 성 메토디오(815-885) 주교 기념일

 

야고1,12-18 마르8,14-24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빛

 

 

 

 

 




오늘은 ‘깨달음의 은총’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주님, 행복하옵니다.

당신이 깨우쳐 주시고, 당신 법으로 가르치시는 사람!

불행한 날에도 평온을 주시나이다.”

 

화답송 시편 첫 구절이 은혜롭습니다.

하느님의 가장 좋은 선물이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깨달음에 관한 몇 가지 예화를 소개합니다.

 

어느 구도자가 동방 수도승을 찾았습니다.

늘 환하게 웃는 표정에 하느님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물어봤습니다.

 


“쉽습니다.

눈만 뜨면 온통 하느님입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바로 지금 여기서 만나는 하느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어제 면담 차 방문한 분의 물음 역시 비슷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하느님을 알 수 있겠느냐는 물음 이었습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으면 일상의 모두가 하느님 체험입니다.

  일상에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통해서

  이렇게 살아있음의 신비에 대한 놀라움, 고마움, 새로움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깨달음도 깊어집니다.

  결코 비상한 깨달음도, 하느님 체험도 아닙니다.”

 


요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느 화창한 봄날의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문 밖을 나섰을 때 활짝 열린 배경으로

화창한 날씨와 만개한 꽃들이 무릉도원을 연상케 했습니다.

 

 
‘아, 이게 깨달음에 눈이 열렸을 때의 내면의 세계를 상징하는 구나’


직감적으로 깨달음처럼 스친 생각입니다.

눈을 감았다가 눈을 뜰 때 활짝 열리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 역시

그대로 깨달음을 상징합니다.

하여 깨달을 각(覺)자에 볼(見)자가 들어있습니다.


어느 깊은 도반관계로 살아가고 있는

아름다운 부부(정태춘, 박은옥)의 대화 한 토막도 생각납니다.

 


-이 사람의 말은

모든 걸 ‘당대의 문제로만’ 또는 ‘당대의 문제만’

바라보지 말라는 뜻이에요.

지금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의 문제에서 벗어나 더 넓고 더 깊게 보라는 뜻이죠.

제가 볼 때 이 사람은 세상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어요.

오히려 시선이 좀 더 넓고, 더 깊고, 더 멀리 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 거리가 너무 커서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요.-(박)

 


“이 사람아, 그건 괜한 미화일세.

내 이야기에 ‘더 큰’이니 ‘더 멀리’니 하는 말은

안 썼으면 합니다.”(정).

 


참 정답고 겸손한 도반 관계의 부부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더 넓고, 더 깊게 보는 내적 시야를 지닙니다.

그러니 바꿔야 할 것은 밖의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내 보는 눈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내 보는 눈이 바뀌면 모두가 새롭습니다.

영적 삶은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깨달음이 깊어지면서 치유되어 깨끗해지고 자유로워집니다.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는 시야에 내면입니다.

 

깨달음, 깨우침, 깨어남, 깨끗함 다 일맥상통합니다.


깨우쳐 주시기에 깨달음이요,

깨달을 때 깨끗한 마음이요,

깨끗한 마음일 때 깨어나 새롭게 시작합니다.

 


탐욕, 무지, 교만, 분노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도 깨달음뿐입니다.

깨달음의 빛 앞에 저절로 사라지는 탐욕, 무지, 교만, 분노의 어둠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하느님을, 나를, 너를 알아갈 때

치유되고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아, 그렇구나.’

‘아, 그럴 수 있지’

‘아 그게 현실이지’ 모두가 깨달음의 표현입니다.

 


진정한 영적 성장도 깨달음과 함께 갑니다.

깨달아 하느님을 알아 갈 때 하느님을 닮아

자비요, 자유요, 지혜요, 겸손이요, 순결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깨달음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각자(覺者) 예수님의 진면목이 확연히 들어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무지를 깨우쳐 각성케 하십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이게 사람입니다.

무디어 지고 완고해져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공동전례 기도를 통한 깨달음의 수련이 절실합니다.

 

하느님 좋으심을 깨달아 갈 때

저절로 터져 나오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기도요,

또 찬미와 감사의 노래 기도가 우리 영혼을 깨워

깨달음의 은총으로 이끕니다.

 


사실 시편 대부분이 하느님 깨달음의 노래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 야고보의 깨달음 역시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깨달음의 열매가 우리에겐 참 좋은 선물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중,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깨달음의 은총을 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새롭게 낳으시며 생명의 화관을 씌워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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