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영적 삶으로의 초대 ∥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17 조회수378 추천수0 반대(0) 신고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시고 숨을 불어 넣은 인간이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광채를 몸 안에 가지고 있다. 이미 내 안에 부여되어 있는 광채를 스스로 밝혀내고 그 빛을 이웃과 상황과 세계에 비춰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관상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스스로의 광채를 세상에 비춰낼 줄 알 때 관상이 비로소 완성된다. 광채가 나지 않으면, 광채를 세상에 비추지 못하면 그것은 관상이 아니라 자기만족, 내지는 착각 관상이다. 진정한 관상은 세상 만물을 광채 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만든다. 이러한 관상이 이뤄질 때 경외심이 지속적으로 터져 나온다.

더 나아가 관상이 완성될 때 그 관상은 나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하느님의 광채를 드러낸다. 나의 눈에 빛이 나면서 하느님께서 빛난다. 나의 입이 빛나면서 하느님께서 빛난다. 나의 광채가 하느님의 광채를 드러낸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러했듯이 프란치스코의 입과 눈이 세상 창조물을 찬미해 광채 나게 하면 그 창조물의 주인인 하느님의 빛이 세상 안으로 들어온다. 이러한 관상은 결국 하느님 뜻에 조화되는(공명, Co nsonance) 삶으로 이어진다. 공명의 삶은 하느님 뜻에 합치, 이웃에 대한 연민과 세상에 대한 융화, 그리고 그 성향들을 통한 역량의 발휘다. 이러한 공명이 완성되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관상이고, 그 관상의 출발점이자 성취물이 경외다. 경외를 모르면 관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또한 관상을 아무리 많이 했다는 수도자라고 할지라도 경외와 외경을 성취해 내지 못한다면 그 관상은 잘못된 관상이다.

관상은 반드시 피정의 집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피정의 집에서만 관상을 할 수 있다면 피정할 돈이 없는 사람, 시간이 없어서 피정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관상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세수하면서, 잠을 자면서도 관상을 할 수 있다. 이웃?세상과의 관계가 없는 산 속에서 하는 관상, 골치 아픈 일 없는 곳에서 하는 관상은 어쩌면 일시적인 안락함만 안겨주는 환상적 관상일 수 있다. 세상 안에서의 관상이 중요하다. 환상이 아니라 삶 살이 안에서 관상이 중요하다. 따라서 내가 관상을 잘 하지 못한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순전히 나의 잘못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건 관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에 가서 관상할 수도 있지만, 집?직장에서 해야 한다. 성가정상을 받은 가정에 가서 관상한다고 해서 내 가정이 저절로 성가정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디디고 서 있는 지금 여기, 삶 살이에서 관상을 할 수 있어야 매일 경외심이 터져 나온다.

지금까지 관상에 대해 수많은 책을 보고, 공부를 했지만 대부분 부분적인 설명밖에 못하고 있었다. 또 설명한다고 해도 추상적이거나 알아듣기 힘든 신비적인 용어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형성신학을 공부하면서 ‘아하~’하고 무릎을 탁 쳤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관상의 소나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경외와 외경을 뿌리로 하는 그 관상의 목적지는 공명의 삶, 하느님 뜻에 조화되는 삶이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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