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7주일 2012년 2월 19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17 조회수432 추천수6 반대(0) 신고

연중 제7주일 2012년 2월 19일.

 

마르 2, 1-12.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앙을 알리는 문서들입니다. 예수님이 믿었던 하느님을 믿고 그분이 하신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전기를 기록하는 것 같이 기록되었지만,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보도하기보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우리에게 알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침상 채로 떠메고 예수님에게 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집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병자를 예수님에게 내려 보냅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의 집 구조는 지붕을 쉽게 벗길 수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어렵게 그분을 만났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보고, 넋을 잃고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말로 오늘의 이야기는 끝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는, 놀라운 일을 하셨고, 사람들은 그 일로써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고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말입니다.

 

중풍병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상인으로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최소한의 생존을 누리는, 위축된 생명의 소유자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이 사람의 병을 고치기 전에 ‘그대는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교는 병을 인간 죄에 대해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은 벌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의 용서를 중풍병자에게 선언하신 것은 그 병이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았다고 생각하며, 위축되어 사는 사람을 예수는 그 선입견에서 해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쳤다는 복음서 이야기들은 병을 하느님의 벌이라고 주장하는 그 시대 유대교를 반박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행이 닥치면, 즉시 그 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모르면, 하늘 혹은 하느님이 주신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의 진학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사업이 실패했을 때, 회복할 수 없는 병을 선고받았을 때, 신앙인들은 흔히 그 원인을 하느님에게서 찾습니다. 그리고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를 하느님에게 적용합니다. 우리 죄의 대가로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는 동네 성황당(城隍堂)에서 빌던 옛날 사람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를 지니고 삽니다. 세상의 생명체이기에 지닌 한계와 약점이 있습니다. 병고, 실패, 각종 장애, 죽음 등입니다. 인간이 인간과 더불어 살기에 발생하는 한계들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경쟁과 실패들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신앙은 하느님의 힘으로 그런 약점과 한계를 극복하려는 수작이 아닙니다. 그런 한계를 겪으면서도, 선하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데에 신앙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분은 율사도 아니고, 사제도 아닙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기득권자들이 싫어하고 미워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가로놓인 이 죽음의 한계를 치워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시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습입니다. 예수의 부활 이야기는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도 하느님은 과연 살리는 분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은 사람을 벌하고 죽이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기의 한계를 기적적으로 뛰어넘어, 독야청청(獨也靑靑)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인간으로서 지닌 자기의 한계를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감춰진 가능성과 힘을 계발하여 발휘하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생명이 위축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예수님은 일하셨습니다. 그분은 죄의 용서를 선포하고, 병을 고쳐서, 그 환자를 위축된 삶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상 생활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정신적 혹은 육체적 도움을 조금만 받으면, 그 위축의 불행에서 벗어나, 정상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그런 우리의 실천 안에 하느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그런 가능성과 힘이 감춰지고, 계발되지 않은 것은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 우리 자신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에 얽매여 삽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친 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으로, 우리 주변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찾지도 염려하지도 마시오. 그런 것은 모두 세상 이방인들이 힘써 찾는 것입니다...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으시오.”(루가 12,29-31).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먹고 마시는 일에만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주변을 본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비로소 감춰져 있던 우리의 가능성과 힘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위축되어 살던 우리 주변의 생명들이 충만한 삶에로 돌아올 것이고, 그 사실을 본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살리고 용서하십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아서 궁여지책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하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차별을 만들어 사람들을 갈라놓습니다. 가진 이와 갖지 못한 이, 병든 이와 건강한 이, 의인과 죄인,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을 우리는 갈라놓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차별과 갈등을 없애십니다. 하느님이 살아 계신 곳에, 그런 차별과 갈등은 사라집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하느님의 일은 복음서들이 전하는 이야기들 안에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읽고 배워서 자유롭게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게 합니다. 그렇게 살겠다고 우리는 세례에서 약속하였습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