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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18 조회수752 추천수14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2월 18일 연중 제6주간 토요일




And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and his clothes became dazzling white,
such as no fuller on earth could bleach them.
Then Elijah appeared to them along with Moses,
and they were conversing with Jesus.
(Mk.9,3-4)



제1독서 야고보 3,1-10
복음 마르코 9,2-13

지난 1월에 인천교구 사제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사실 올해의 사제서품식을 준비하는데 걱정이 하나 있었지요. 이는 성가를 부를 신학생 숫자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입생 합격 발표가 늦어져서, 신입생을 제외한 성가대 숫자가 적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합격 발표 후 서품식까지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있어서, 음악부장에게 일주일 동안이라도 신입생을 데리고 성가 연습을 하라고 말을 했지요. 그러나 음악부장은 난색을 표하는 것입니다. 아직 라틴어 성가도 모르고 또 어떻게 부르는지 모르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도 힘들고 성가대의 일치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어렵다는 이유였지요.

사람만 있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없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협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방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지요. 그러면서 문득 내 자신은 이 세상을 살면서 내가 만나는 이웃들과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협조자의 모습이었는지, 아니면 이웃들에게 피해만 주고 있는 방해자는 아니었는가를 말입니다.

만약 시속 100Km로 달려야 하는 도로에서 한 대의 자동차가 30Km로 가고 있다면 어떨까요? 이 자동차는 분명 운전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너무 느리게 가기 때문에 따라오는 모든 차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본연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협조자의 모습이 아닌 방해자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협조자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행하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타볼산이라고 불리는 높은 산에 오르시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이 제자들은 아주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엘리야, 모세를 본 것뿐만 아니라, 스승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을 보게 된 것이지요. 이 상황에서 제자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가 나서서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이제까지 너무나 힘들었던 전교여행. 그런데 거룩한 변모 장면을 목격하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존경을 받는 엘리야, 모세를 만났으니 이곳에서 눌러 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그러한 제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협조자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하늘에서 이러한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의 협조자가 되는 길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것. 이 사실을 기억하는 진정한 주님의 협조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의 말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다(조지 W.크레인).


예비신학생 지도자 워크샵이 있었습니다. 올해의 예신모임 준비를 위해 모였습니다.
열심히 잘 준비한 만큼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간판은?
 

속된 표현으로 ‘간판’이 중요하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내세울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학벌, 지위, 가정, 출신 등등.... 소위 간판이 좋을 때 사람들은 이러한 반등을 보이곤 합니다. 이른바 명문대 출신인 사람이 10개 중에서 9개를 잘못하고 하나라도 잘하면 “역시 달라. 달라도 뭐가 다르지.”라며 칭찬합니다. 그러나 간판이 별로인 사람이 10개 중에서 9개를 잘하고 단 하나 잘못하면 “그럴 줄 알았어.”라는 비난을 쏟아 붓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간판을 가꾸는데 참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정말로 중요할까요?

우리 신앙인들에게 자랑할 만한 간판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간다는 것. 주님의 협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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