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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월19일 야곱의 우물- 마르2,1-12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19 조회수338 추천수2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1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율법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 8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 9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

10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작은 사건 안에서도 주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제 편견을 비우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 Lectio )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오시어 집에 머물고 계시다니,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었겠습니까 ?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2,1 – 2ㄱ절 ) 이때 네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고자 중풍 병자를 들것에 들고 왔지만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다가 설 수가 없었습니다.( 3 – 4ㄱ절 ) 그들의 좋은 의지가 군중이라는 장애를 만난 것입니다. 흔히 사람은 누군가를 위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곤경에 부딪치면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만, 그 일에 확고한 의지를 지닌 사람은 장애를 넘어 방법을 찾고 실행에 옮깁니다.


더욱이 그들은 한 개인의 의지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협동을 해야 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붕을 벗기자는 도전에 일치합니다. 지붕을 벗기고 누워 있는 환자를 들것에 달아 내리는 것은 환자에 대한 깊은 애정과 예수님께 대한 확고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일치된 의지와 행동은 예수님께 ‘믿음’ 으로 인정받았습니다.( 4ㄴ – 5ㄱ절 ) 또한 중풍 병자는 그 자신의 믿음보다 ‘그들의 믿음’ 을 통해 ‘죄의 용서와 치유’ 를 얻었습니다.( 5ㄴ.11절 ) 이처럼 믿음은 개인적인 신앙을 기초로 하지만 공동체를 통해 더 분명해지고 풍요롭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에서도 한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신앙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본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 12ㄷ절 )고 합니다. 반면 아집에 차있는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모독한다.”  ( 7절 )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만 사죄권을 가질 뿐 그 누구도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는 고정관념에 묶여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탓입니다.( 5ㄴ – 7절 ) 그래서 제1독서는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 이사 43,18 – 19ㄱ )고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두드리는 것일까요 ?


완고한 마음이 요청하는 ‘죄의 용서’ 에 대한 실증은 ‘육신의 치유’ 에 있습니다. 유다인은 헤어날 길 없는 시련과 질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질병이 죄의 결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요한 9,2 – 3; 루카 13,1 – 5 참조 )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언급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마태 11,28 )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짊어진 무거운 짐을 ‘죄’ 에서 찾으셨던 것일까요 ?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아시는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는 말씀으로 보여주십니다.( 마르 2,8 – 11; 1열왕 8,39; 1사무 16,7 참조 )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치유는 단순히 중풍 병자가 일어나 걸어가는 현상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는 죄의 용서로 죄의 짐을 벗고 얽힌 내적 관계를 회복하였기에 영혼과 육신이 치유되어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 2,12 )


예수님께서 우리한테 용서와 치유를 베푸신다 해도 정작 치유될 수 없는 불치병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념과 고정관념에 묶여 더 이상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적 중풍병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당신을 찾아 온 이유가 어떠하든지 먼저 ‘복음 말씀’ 으로 그들의 영혼을 깨끗이 치유하고자 하신 것은 아니었을까요 ? ( 2ㄴ절 )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 마태 5,8 )

묵상  ( Meditatio )

깊고 간절한 마음은 닿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지붕을 벗기는 것이 수월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 그분만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간절함은 상식을 넘어 산을 옮기며 ( 마르 11,23 ) 편견을 비켜서서 희망하고 ( 2,17 ) 무례함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1코린 13,5 ) 제가 죄인임을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저의 의지를 공동체의 의견에 맡길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이웃의 이견異見을 수용할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 주님을 향한 간절함 때문입니다.

기도  ( Oratio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 그분께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분의 오른손이, 그분의 거룩한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다.( 시편 98,1 )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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