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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역사 예수와 복음 예수 이해 [지나온 글 묶음]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20 조회수335 추천수0 반대(0) 신고


[ 말씀은 ''글로 된 무언의 말''이 아니다  =>  이를 ''귀신이다''고 말한다 ]


철학하는 사람은 ''구조''를 살피는 사람이다고 말한다. ''구조''를 볼 수 없다면 철학을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구조''에는 무엇이 있을까 ( 어떤 구조가 있을까 ) 사회구조, 문화구조, 경제구조, 정치구조, 건축구조, 가정구조, 종교구조, 언어구조 (문자구조) 등등 가히 그 영역은 광대하다.

특히, 성경의 문자 구조를 찾고자 하는 철학도 있다. 신앙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앙의 영역이 아니고 철학의 영역이다. 의심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철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진리에 대한 의심이 없다면 철학은 멈추게 된다. 그러고 보면 철학으로 인식할 수 없는 신앙의 요소들은 맹신에 불과할 뿐이다.

철저하게 모순 구조를 살펴보고 난 다음에 (곧, 철학하고 난 다음에) 거짓이 아닌 참으로 인식될 때에만 맹신이 아니다고 판정한다. 철학하는 이들에게 <모순과 구조 그리고 의심>이 없다면 철학은 불가능하게 된다. 철학은 앎이 목적이다. 끝없이 (진실을 향해서) 의심해야만 철학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진실''의 앎에 도달하고자 하는데 ''철학을 한다''는 양심이라는 ''철학 양심''이 필요하다.

이 모든 <철학적 작업>을 신앙에 대입시키면 바로 철학의 변형 <신앙적 작업>이 되어진다. 철학적 작업에는 문자만 보인다. ''문자의 영''은 볼 수 없다. 신앙을 철학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이성이 필수적이고 중요시 하는 철학적 작업에서는 이성을 초월하는 ''영''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성경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다. 역사의 한 인간일 뿐인 예수의 사상만 있을 뿐이다. 말씀이 아니라 문자일 뿐이다는 설명이다.

철학이 신앙의 가면을 쓰고 철학적 사유 곧 ''의심''이 성경 문자의 구조적인 모순을 찾아 진실인가, 혹은 거짓인가를 판정내린다. ''의심'' 없이는 철학을 할 수 없듯이 신앙 조차도 ''의심'' 없이는 할 수 없다고 대입시키는 것이다. 말씀이 아닌 오로지 문자로만 보면성경 문자의 모순 구조를 밝히는 작업은 말씀에 대한 신앙이 아닌 철학 작업인 것이다.

성경말씀은 인간의 불완전한 문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불완전한 문자 속에서도(문자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신 ''말씀의 영''(진리의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말씀''속의 성령을 인정할 수 없다.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는 ''영''이기 때문이다. (말씀 속의 성령을) 귀신으로 취급되어질 뿐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고 생명이다''고 하셨다. (요한복음서) 철학하는 이성에서는 ''말씀 속의 영(진리의 성령)''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문자에만 매달리고 문자의 모순 구조를 밝히는 신학적(오히려 철학적) 작업이 신앙의 진지한 모습으로 보여질 수 있지만 ''의심'' 없이는 철학 양심에 따라 결코 철학할 수 없기에 신앙에서도 그(의심) 근본이 없을 수 없다. (숨길 수 없다) 마치 신학의 진지한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신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자만을 (철학적으로) 취급가능 하기 때문이다. 철학하는 이성은 신학에서도 문자, 하느님의 말씀에서도 문자 밖에는 취급할 수 밖에 없다. 문자의 모순구조를 분석하고 진실과 거짓을 밝히고자 하는 철학적 ''의문''(의심)은 결코 신앙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영''으로 ''영''을 인식해야 하는 신앙의 영역에서 철학하는 이성과 철학하는 의심은 적당하지 않다고 하겠다.

''신앙''의 문자에 대한 모순점을 ''신학''의 문자를 통해서 가려낼 수 있는 이성은 신앙의 ''영''의 영역에는 결코 들어올 수가 없다.단지 귀신일 뿐이기 때문에 ''말씀''의 출입은 허락되지 않는다.

<교리서 108>

그리스도교 신앙은 ‘경전의 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말씀’의 종교이다.
그 말씀은 글로 된 무언의 말이 아닌, 사람이 되시어 살아 계신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 진리 = "인간 이성에 자명(自明)한 자연적 진리가 아니고, 신앙으로 받아들인 초자연적 진리이다" ///  신학 = "신학은 신앙으로서 수용한 계시를 신앙의 지도를 받는 이성으로서 음미하는 노력이며, 철학을 도구로 사용하지만 이성의 빛만으로 종교를 연구하는 종교철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  "계시를 철학으로써만 관찰하는 종교철학이 아니므로 인간적 논리를 최후 근거로 하지 않는다." <가톨릭대사전>

<교리서 157> 신앙은 확실한 것이며, 그것이 거짓 없으신 하느님의 말씀 자체에 근거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인식보다 더 확실하다. 물론 계시된 진리들이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에 비추어 모호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자연적 이성의 빛이 주는 확실성보다 하느님의 빛이 주는 확실성이 더 크다.

<교리서 108> 그리스도교 신앙은 ‘경전의 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말씀’의 종교이다. 그 말씀은 “글로 된 무언의 말이 아닌, 사람이 되시어 살아 계신 ‘말씀’”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 죽은 문자로 머물지 않으려면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성경을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 한다.

말씀이 [ ''문자''로서만 인정하고, ''영''으로서는 인정할 수 없는 (귀신이다) ] 이들에게는 성경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 "글로 된 무언의 말이 아니다"를 귀신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성경을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 한다" 신앙이 아닌, 이성으로써는 ''계시의 빛''을 이해할 수 있기는 힘들다 할 것이다.  


" ...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마르코 8, 35 - 9,1>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만에 대한 말씀이 아니시다.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시기도 하다. 예수님과 복음 말씀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복음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부끄럽게 여기실 것이다고 일러 가르쳐 주신다.

인간의 역사성에 몰입되어 있는 사람은 역사의 초월성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한다. 몰입이라는 것은 대단한 아집과도 같다. 그래서 현재성은 인식하지만 초월성에 대하여서는 인식이 불가능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온다는 초월성을 현재성으로 변형시켜 버리기 쉽상이다. 인식할 수 없는 초월성을 인식 가능한 현재성으로 바꾸어 버린다 할 것이다. 초월성은 현재의 인식 너머에 존재해 있기 때문에 대상의 변질이 쉽다.

교리서 677
교회는 그 죽음과 부활 안에서 주님을 따르는 이 마지막 파스카를 통과해야만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나라는 상승적인 발전에 따른 교회의 역사적 승리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신부를 하늘에서 내려보내실 하느님께서 악의 마지막 발악에 대해 승리하심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악의 반역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는, 지나갈 이 세상의 우주적인 마지막 동요가 있고 나서 최후의 심판의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다.

현재성에 몰입되어 빠져있으면 상기의 교회의 가르침을 인정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인식 가능한 것만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초월적인 인식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초월적인 것은 지성에 있고 현재적인 것은 이성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흔히 역사는 진보하면서 발전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교회도 그같은 역사성에 따라 자연히 상승 발전하면서 결국에는 교회의 역사적 승리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된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악의 마지막 발악에 대해 승리하심으로써 당신의 신부(새 예루살렘)를 하늘에서 내려 보내시면서 교회는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다.

신앙의 복음을 초월적인 하늘에서 ''끌어 내려'' 역사적인 현재화로 변형시키는 결과 육신의 부활과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 맹신에 불과하다며 ''부활된 영적인 삶''으로 이성의 ''인식 가능''한 것으로만 취급해 버린다면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인 예수님과 복음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다.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예수님과 복음 말씀을 조롱하고 비웃는다는 의미와 같다.

"역사의 예수님과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서 분명히 고백해야 하는 일은 <복음의 예수님께서 바로 역사의 예수님>이시다는 사실의 고백이 신앙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역사의 예수님과 복음의 그리스도를 분리시켜 <다른 예수 상>을 만들어 내게 하는 복음의 그런 재해석은 ''악의 시도''에 불과하다. 역사 안에서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만들어 내는 불의한 짓은 그만 두어야 한다. 역사의 예수님은 바로 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역사의 예수님''과 ''복음의 예수님'' 용례


<복음의 예수님>이란 복음에서 드러나신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말씀 속의 예수님을 가리킨다. 역사의 예수님은 바로 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역사의 예수님>에서 어떤 이들은 역사 안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교(기독교)를 만들지 않았다거나, 교회를 만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비해서 ''복음의 예수님''은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 16, 18>와 같이 복음의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만드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역사의 예수님''으로 한정하는 사람은 자기 뜻(이념)에 따라 "다른 예수 상"을 만들어 내는 것('미륵예수' ㅡ 게시자 글 참조)이다.
복음도 재해석 되어진다 할 것이다.

 
복음의 재해석 ㅡ "다른 복음"이란


''역사의 예수님''에서 파생되어져 오거나 서로 융합해서 작용하는 <''복음의 재해석'' ㅡ 다른 복음>이란 어떤 이들은 인간에게 있어 ''육신의 부활''은 없고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도 인간의 상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을 믿고 바라는 것은 일종의 ''맹신, 광신''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도 살아 생전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고 했다면서
''생전''(역사성)을 강조한다. ''육신의 부활''은 현대의 과학적으로도 입증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현재의 인간이 ''부활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의 ''생전''에서의 부활과 합치한다는 것이고

''하느님의 나라''도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역사성) 그같은 ''생전의 부활''로 살 때를 말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복음의 재해석 곧, 부활 복음의 재해석인 것이다. ("다른 복음") 그러나 복음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활은 인간의 온갖 세상적 이념(사상)으로 정립(재구성)되어 지는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의 부활''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통하여 자기 안에 '말씀의 육화'(말씀의 현재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활'의 의미로(정신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익히 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현재화하여야 한다는 정신도 경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이유로 말미암아 - 예를들면 - '육신의 부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복음, 하느님의 말씀(성경)까지도 사라지게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대한 무서운 불법(불의)이 된다는 것은 더욱 잘 인식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사상, 이념 = 계몽주의, 이성주의, 다원주의, 상대주의 등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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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서 2847 성령께서는 우리가 “시련을 이겨 내는 힘”을 다지기 위하여 인간의 내적 성장에 필요한 “시련”과, 죄와 죽음으로 이끌어 가는 “유혹”을 분별하도록 하신다. 또한 우리는 유혹을 ‘당한다’는 것과 유혹에 ‘동의한다’는 것도 분별해야 한다. 끝으로, 분별력을 이용하면, 우리는 유혹의 거짓된 가면을 벗길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 유혹의 대상은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이지만”(창세 3,6), 실제로 그 열매는 죽음이다.

교리서 2819 “하느님의 나라는…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마지막 때는 성령께서 내려오신 때이다. 성령 강림 이후로 “육”과 성령 사이의 결정적 싸움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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