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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21 조회수897 추천수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2월 21일 연중 제7주간 화요일




“If anyone wishes to be first,
he shall be the last of all and the servant of all.”
(Mk.9,35)
 


제1독서 야고보 4,1-10
복음 마르코 9,30-37

지난주일 신학생들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개학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신학생들이 밥 한 끼 사달라고해서 만나기로 했지요. 시간에 맞춰서 약속장소로 향하고 있는데, 깜빡 잊고 휴대전화를 가져오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서 휴대전화를 가져오자니 약속시간에 늦을 것 같았기에, 휴대전화 없이 약속장소로 갈 수밖에 없었지요. 계속해서 불안했습니다. 아주 급한 전화가 올 것만 같았고, 제가 전화를 받지 않아 커다란 낭패를 당할 것 같은 불안감이 계속되었지요.

신학생과의 만남을 끝내고 집에 들어오면서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휴대전화를 꺼내든 순간, 많은 전화와 문자가 와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화는 모두 받지 않아도 되는 080, 060 등으로 시작되는 전화였고, 문자 역시 대리운전 선전에 관한 문자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불안했지만, 사실 불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특별한 일 그리고 급한 일이 생길 것 같았지만,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단지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아 생긴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처럼 휴대전화를 보편적으로 쓰지 않았을 때에는 분명 없었던 불안감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불안감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지요(저도 휴대전화 중독인가 봅니다). 하긴 요즘에는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도 상대방의 얼굴보다는 휴대전화를 더 많이 들여다보는 경우를 종종 체험하면서 아쉬움을 갖게 됩니다.

문명의 발전과 풍요로 많은 것을 누리는 것 같지만, 이와 반대로 정신적으로는 점점 더 피폐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예전에는 전화비로 한 가정에 2만원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요즘에는 한 사람의 전화비가 최소 3만 5천 원 정도 된다고 하니 경제적으로도 그 부담이 작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도 또 정신적으로도 손해를 주는 휴대전화를 손에서 떼지 못하는 현대의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게 손해를 주는 모든 것들을 극복하게 도와주시는 것은 물론 더 큰 행복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주님의 손길에서 왜 벗어나려고만 할까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 몸에 휴대전화를 간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라는 문제로 논쟁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워 누가 큰 사람이냐는 논쟁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을 따라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 기준이 바로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의 기준만을 쫓는 우리, 더욱 더 하느님의 기준이 필요한 우리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나니 마음을 비운 만큼 채울 수 있는 것도 이제야 알았습니다.(좋은 글)


어제 서울 월계동성당에서 꼬미시움 영성교육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성자였던 형님
 

어느 동네에 악동(깡패)으로 이름난 두 형제가 살았는데, 두 형제 중 형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사람들을 괴롭힌 자였으므로, 모두가 그의 장례주례를 꺼리는 것입니다.

고민을 하던 동생이 1만 불을 사례하기로 하고 어느 젊은 성직자에게 장례식 주례를 부탁하였답니다. 그런데 동생의 소원은 장례식 도중에 자기 형님을 가리켜 ‘성자’란 말을 꼭 한마디만 해달라는 것이었지요.

젊은 성직자는 고민을 했지요. ‘성자’라는 말을 붙이자니 왠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고, 또 하지 않자니 동생에게 괴롭힘을 당할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주례를 맡아 장례식 강론을 하는 도중에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고인은 악하게 살았지만, 그래도 지금 살아있는 동생보다는 성자입니다.”

나의 장례식 때, 내 자신은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지를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기왕이면 ‘성자’의 평을 받는다면 훨씬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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