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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극기의 목적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23 조회수640 추천수10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2년 나해 재의 예식 후 금요일 - 극기의 목적

 


 

어렸을 때부터 행복하기를 바랐고 그래서 늦게나마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행복하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불만만 늘어가고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며칠 굶어보기로 했습니다. 남들은 일주일씩도 단식하던데 저는 이틀 안 먹으니 뱃가죽이 등에 붙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 성체를 영하면서 제가 얼마나 교만해있었나 반성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 하는데 마땅한 행복을 주시겠지!’라고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불러준 것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셨는데 뭐 대단한 일이나 해드리는 것처럼 잔뜩 교만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침을 먹는데 밥이 태어나서 그렇게 맛있는 식사는 처음 해 본 것 같습니다. 밥알 하나하나를 헤아리며 그 하나하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었습니다.

이렇게 겸손함을 되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단식’을 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밥을 먹지 않을 때는 이런 결과가 올 줄 몰랐습니다. 내가 교만해져 있을 때 몸을 좀 괴롭히는 것은 다시 그리스도를 만나는 좋은 결과를 가져다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몸을 괴롭히는 만큼 영적인 진보가 빠르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학 가서는 잠을 4시간 정도 자고 밥도 하루에 한 끼 먹고 고기도 안 먹고 물도 잘 마시지 않았습니다. 삼일 가까이 음식은 물론 물도 한 방울 안 마셔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보다는 20킬로가 덜 나갔습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그렇게 살았지만 처음 신학교 들어와서 이틀 굶었을 때보다 얻은 것이 별로 없는 듯했습니다. 그냥 힘들기만 하였습니다. 배가 고프니 자연적으로 얼굴이 찡그려지고 함께 놀아달라는 친구들도 조금은 귀찮아졌습니다. 그래서 혼자 있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힘이 드니 수업시간엔 졸려서 잠들기 일쑤였고 그래서 성적도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자신의 육체를 이기는 사람이다.’라는 자만심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몸도 이기지 못하여 해야 할 일도 제대로 못하는 이들을 교만한 마음으로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아마 오늘 복음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그들도 단식 자체가 무조건 좋은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황을 분별해가며 단식을 하라고 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사실 제가 처음 신학교 들어왔을 때는 그리스도를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교만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 때는 그리스도를 다시 되찾기 위해 단식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중에도 단식하는 것은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교만하게 만들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씨시에 가면 프란치스코가 욕정이 오를 때마다 뒹굴었다는 장미 밭이 있습니다. 그 장미 밭에서는 아직도 가시가 없는 장미가 자라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보고 싶었던 여인은 걸어서 30분 거리의 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글라라였는지도 모릅니다. 글라라도 프란치스코가 보고 싶었을 텐데, 프란치스코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제자들에게, “여기에서 거기까지 길에 꽃이 피지 않으면 나는 그 곳에 가지 않겠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정말 길 양옆에 꽃이 피었습니다.

육체를 절제하는 것이 마냥 좋다고 하여 그래도 글라라를 보러가지 않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은 프란치스코가 이미 충분히 당신과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약간의 육체적인 즐거움도 허락하신 것입니다.

 

몸 안에 죄의 뿌리들이 있어서 몸을 컨트롤하기 위해 괴롭히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 죄 때문에 그리스도를 잃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는 몸도 그 분의 함께 함을 즐겨야 합니다. 몸도 그리스도를 차지하려고 노력했고 나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 분을 함께 누릴 권리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을 잃게 되면 그 이유는 바로 육체적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다시 몸을 괴롭힐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배반한 이후에 어찌 밥이 입으로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혹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어찌 단식할 수 있었겠습니까? 좋은 것이라고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고 있다고 해서 남도 하라고 절대적으로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금육이나 단식을 하더라도 그 목적은 항상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맞아들이기 위한 목적이지, 그 자체로 항상 좋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힘이 듭니다. 그것이 단식입니다. 그러나 정상에 올랐을 때도 계속 오르다가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정상의 목적을 달성했다면 내려올 줄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도 먹보요 술꾼으로 오해받으실 정도로 먹고 마시기는 하셨습니다. 육체 안에 원죄의 씨앗들이 들어있지만 육체도 영혼 구원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나의 일부분입니다. 무엇이든 그 목적이 무엇인지 먼저 깨닫고 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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