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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사순 제1주일 2012년 2월 26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2-24 조회수516 추천수4 반대(0) 신고

사순 제1주일 2012년 2월 26일

 

마르 1, 12-15.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광야로 나가셨다고 말합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신앙 초기에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임을 자각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분이 당신 생애의 어느 시기에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광야로 나가셨다는 말은 그분이 그 때부터 하느님에 대한 깊은 체험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뜻입니다. 40일이라는 날의 수는 옛날 모세가 40일 동안 시나이 산에서 단식했다(탈출 34,28)는 사실과 엘리야 예언자가 40일을 걸어가서 호렙산에서 야훼를 만났다(1열왕 19)는 고사(故事)를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들과 같이 하느님에 대해 깊은 체험을 하는 기간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 말씀을 오늘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말하면, 율법과 성전에 예속되어 살던 때는 지나갔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삶 안에 하느님이 일하시게 살아서, 하느님이 우리의 자유와 기쁨의 원천이 되시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절대적이라 말하던 율법과 성전 의례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처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실세인 율사와 사제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율법과 제물 봉헌을 절대화하여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왜곡시킨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어느 날, 율사 한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라고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그가 슬기롭게 대답한다고 하시며 “당신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마르 12,34)라고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의 친밀한 관계에 비유하여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십니다. 부모 앞에 자녀는 지키고, 바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생명을 받아 출생하였고, 돌보아주고 가르치는 부모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여,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됩니다. 부모로부터 은혜로운 베풂의 흐름이 있어 시작된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그 은혜로움에 대한 자각을 유교 문화권에서는 효(孝)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에 대한 효를 넘어 자녀는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로운 사랑을 부모와 주변의 모든 이에게 실천해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부모의 은혜로움에 비추어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알아듣고, 배워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밭에 익어 가는 곡식을 보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늘에 날아가는 새와 들에 핀 꽃을 보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셨습니다. 모두가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베푸신 결과였습니다. 그 은혜로우심을 자유롭게 실천해야 하는 우리 인간이라고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베풀고 살리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 실천하라고 주어진 우리의 자유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자유롭게 배우듯이, 인간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배워 자유로이 실천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겁내지 마시오, 작은 양떼들! 그대들의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에게 기꺼이 그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루가 12,32). 하느님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내세(來世)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현세에도, 내세에도 하느님이십니다. 현세에서 하느님의 자녀이면, 내세에서도 그분의 자녀일 것입니다. 내세에 대해 우리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우리의 상상과 우리의 언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내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성서는 그분이 하느님과 함께 살아 계시다는 사실 외에 아무 것도 더 말해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통념을 넘어 생각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을 영접하고 깨닫는 길은 그분의 베푸심과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회개(悔改)입니다. 회개는 자기의 과거를 샅샅이 성찰하여 죄를 찾아 아파하는 자학(自虐)적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과거를 돌아보고 부르짖는, 절망의 ‘내탓이오.’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뒤를 돌아보고 살도록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눈, 코, 입, 귀 등 우리의 감각 기관들이 모두 앞을 향해 있습니다. 뒤는 잠시만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기 과거를 잠시 보고, 하느님을 향한 자기 삶의 궤도를 수정하는 작업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소중히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단편적입니다. 우리는 속단하고, 미워하고, 분노합니다. 회개는 이기적이고, 단편적인 우리의 행보를 하느님의 은혜로우신 사랑에 비추어 조정하는 작업입니다. 아버지의 생명이 우리의 자유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작업입니다.

 

이기적 욕심으로 복음을 읽으면, 복음은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없습니다. 복음은 지혜도, 깨달음도 주지 않습니다. 복음에 접근하는 사람은 이기심의 수위를 낮추어야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유혹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한 나머지, 하느님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대단한 고행을 요구하지도 않고, 우리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단편적입니다. 자기만이 정의를 다 알고 있는 듯,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은 결국 그 정의 때문에 사람들에게 횡포하고 피해를 줄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신앙인은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에서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려 노력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중심으로 하느님과 세상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헌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황량한 사막을 당신의 거처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우심을 이웃에게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나라가 오실 것’을 빌며 사는 자유로운 신앙인의 행보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잘못된 우리 자유의 궤도를 수정하여, 베풀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일이 우리 안에 살아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순시기의 첫 주일입니다. 과거만 보고 가슴을 치자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등지고 작심하여, 살벌하게 살자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여 주변을 기쁘게 또 살맛나게 하는, 은혜로운 것이 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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