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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죽기 전에, 죽어서 부활한다 [참조 자료 변경]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01 조회수361 추천수0 반대(0) 신고



세례와 부활 = 재생으로 같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소순태님 댓글 참조>

소순태
(sunsoh) (2012/02/29) : 예를 들어, 가톨릭 보편 교회의 "통공 교의"의 핵심이 담겨 있는 "세례"를 두고서, 누군가가 자꾸 "세례가 곧 부활이야!" 라고 주장한다면, 그러한 자가 사용하는 용어들인 "세례"와 "부활"의 정의(definition)들이 무엇인지 (여기에는, 가톨릭 교회에서 정의하고 있는 "세례"와 "부활"의 의미와 어떻게 다른지를 포함됨)를 우선적으로 잘 들여다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ㅡ 주님의 부활을 미리 봄).....(우리 자신의 거룩한 변모 ㅡ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미리 봄) => 두번째 재생의 성사 (보이지 않는 은총이 보이는 형태로 주어지는 것) 두번째 재생의 성사적인 삶 = 부활의 삶 ??? 보이지 않는 부활의 은총이 보이는 형태로 주어지는 삶 = '부활의 삶' ?

소순태 (sunsoh) (2012/02/29) : + 찬미 예수님! 장 형제님께서 추가적으로 잘 지적하셨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사후일까요? 아니면 "인생 한 복판"(이제민 신부님)일까요? 주님의 부활을 미리 보여준 사건 => '거룩한 변모'인데 주님의 거룩한 변모가 이루어진 것이 사후일까요? 아니면 이제님 신부님의 개념정의 처럼 "인생 한 복판" 일까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가 예수님의 부활을 앞서 보여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민 신부님 처럼 예수님의 <인생 한 복판에서 부활이 이루어졌다면> 왜 죽으셨을까요? 이제민 신부님께서는 "부활이 죽기 전에 일어나는 사건"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죽기 전에 거룩한 변모>가 이루어졌을까요? 죽음을 맞이하고 아예 끝남이 거룩한 변모일까요? 아니면 죽음 후의 부활이 거룩한 변모일까요? 이제님 신부님의 글에 <"부활은 죽기 전에 일어나야 할 사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물학적인 죽음 전에 일어나야 할 사건이 '부활'이다고 말합니다.

죽기 전에 <"인생 한 복판에서"> 죽을 수 있는 존재(인간)가 부활하여 '부활의 삶'을 산다고 이제민 신부님은 말합니다. 이제민 신부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죽어야 부활한다'는 의미로써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민 신부님은 <부활은 죽기 전에 일어나야 할 사건>이다고 하면서 <사람은 생물학적인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이제민 신부님의 말은 <생물학적으로 죽고 나면 '부활'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제민 신부님은 <죽어야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이제민 신부님에 의하면 "인생 한 복판에서"의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어떻게 죽어야 할까요? 이제민 신부님은 <자신을 죽이는 삶>을 '죽음'이다고 언급하면서 '이 죽음'에서 부활하는 부활의 삶을 말합니다. 골고타 사건은 <자신을 죽이는 삶을 최종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하고 이제민 신부님은 말합니다.

이제민 신부님 처럼 과연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죽기 전에 ㅡ 죽어서 ㅡ 부활해야 한다>는 것이 이성적으로 타당한 이치일까요? 어떻게 죽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어떻게 부활한다는 말일까요? <죽기 전에 ㅡ 죽어서 ㅡ 부활해야 한다>는 이신부님의 주장은 '재생의 삶'에 가깝고 '부활의 삶'이라고 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세례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고 성경과 교회는 가르치고 잇습니다. 여기서의 죽어서 부활해야 한다는 이제민 신부님의 '부활의 삶'은 결론적으로 [ 첫번째 재생의 삶 (세례성사) ]에 대한 설명과 같아 보입니다.

영신적인 의미로서 재생의 새로운 삶(인간) 곧, 영신적인 인간으로 재생 ( 새 인간) 이는 죽어서 부활하는 삶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재생의 삶이다 생각해 봅니다.



<참조> 185531번글 재생의 삶? 부활의 삶? [첫번째 재생과 두번째 재생]의 댓글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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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문제는
죽기 전에 ㅡ 죽어서 ㅡ 부활한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이제민 신부님께서
"죽어서 부활해야 한다"
하고 말하셨습니다

이것은 죽어야 => 부활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민 신부님께서는
인생 한 복판에서 (생물학적인 죽음 이전에서)
죽어서 부활한다는 것이 부활(의 삶)이다고
단정내리십니다


인생 한 복판에서 (생물학적인 죽음 이전에서)
 어떻게 죽어서 ㅡ 어떻게 부활합니까


죽기 전에 ㅡ 죽어서 ㅡ 부활해야 한다고
이제민 신부님의 주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민 신부님께서는
이 부분의 설명을 제외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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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참조할 이제민 신부님의 부활설입니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이제민 신부 "나는 저승을 믿지 않는다"
이제민 신부의 '내가 믿는 부활은?'- 2

‘내가 믿지 않는 부활’이라는 말로 실마리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부활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상투적으로 믿는 부활을 넘어선 경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천국이든 극락이든 저승을 믿지 않는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여 가게 된다는 저승(천국이든 극락이든)을 믿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느님나라의 복음(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지금 여기에.)을 통하여 저승에 대한 우리의 상투적인 사고를 수정하여 주신다. 부활신앙은 죽음이 지배하는 듯한 세상이지만 불사불멸의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고백하게 한다. 이 신앙은 언젠가 사라지고 마는 인생이지만 하느님처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함을 선언한다. 이 신앙은 세상을 사랑하게 한다.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저승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부활신앙은 복음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된다. 세상을 떠나야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복음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말씀하신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마르 1,15)

세상을 향하여 회개한 자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세상을 떠나려는 생각을 버리고 세상을 향하여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에 맞갖은 충실한 삶을 지금 여기에서 살 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마태오복음 25장) 우리는 살아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부활의 기쁨을 맛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며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교는 현실 도피의 종교가 아니다.

다시 살아나는 삶은 없다

나는 내가 죽은 후 얼마만큼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살아나게 되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죽음으로 내 인생은 모두 끝난다. 다시 살아나는 삶은 없다.
보통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생각하는 부활은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특히 그리스철학을 비롯하여 무수한 철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부활신앙도 변질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생과 사, 영원과 시간을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하나의 개념으로 대하지 못하였다. 그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도 인간이 죽으면 육은 땅에 묻히고 영은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된다는 식의 사고에 젖어들게 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교적 사고가 아니었고, 초기교회는 당연히 이런 사고를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이것이 ‘육신의 부활’을 이야기하게 된 배경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부활을 도로 그리스 식으로 받아들여 ‘육신의 부활’을 영과 재결합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육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기에 영만의 부활이나 영과 육의 재결합을 모른다. 부활을 깨닫기 위해서는 영과 육, 생과 사가 하나의 실재를 이루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사멸하는 육을 지닌 존재지만 불사불멸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영원한 존재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이다.

부활은 살아 있는 동안 체험해야 한다

나는 산 자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산 자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부활은 살아 있는 동안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산 자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덤에 묻힌 시체가 다시 살아나 영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은 의미하며 동시에 산 자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미 부활했거나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다.

우리보다 앞서 죽은 이들이 지하세계에서 부활을 기다리며 누워 있다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상상일 뿐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나는 부활이다”라고 하신 말씀에 유념해야 한다. 무엇을 체험하였기에 그분은 살아 있는 당신을 부활이라고 하셨는가?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달아났던 제자들은 무엇을 체험하였기에 다시 돌아와서 그분의 부활을 선포하는데 목숨을 걸었을까?

‘사후’는 ‘인생 다음’이 아니라 ‘인생 중’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나는 ‘사후’를 믿지 않는다. ‘사후’란 없다. 그렇다고 ‘사후’에 대한 이야기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후’의 세계는 생물학적인 목숨이 끝난 다음 펼쳐지는 세계가 아니다. ‘사후’는 ‘인생 다음’이 아니라 ‘인생 중’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죽은 다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인생이 끝난 다음’ 사흘의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후’는 인생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며 또 이 시간 안에 일어나게 해야 하는 일이다. 살아 있는 동안 내 인생에 ‘사후’가 발생하게 할 때 새 하늘 새 땅 새 세계가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는 새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십자가 죽음 이전에 “나는 부활이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새 인간이다. 이로써 그분은 죽음이 생의 마지막에 다가오는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의 삶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깨우쳐 주셨다. 이를 깨달은 자는 늘 부활의 삶을 산다. 부활은 죽기 전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고, 죽기 전에 일어나야 할 사건이다. 인간은 죽기 전에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부활은 깨달음의 문제이다. 살아 있는 자만이 깨달을 수 있기에 그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 죽은 자가 부활할 수 없는 것은 죽은 자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활신앙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 부활의 이치를 깨달아 새 삶을 살도록 하라’는 것이다. 부활신앙은 살아 있는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살게 해준다.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바오로는 말한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한다. “우리 머리가 물속에 잠기듯, 낡은 인간은 무덤에 묻히고 완전히 잠겨 영영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우리 머리를 물에서 다시 건져 낼 때 거기서 새 인간이 태어난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죽음을 통해서 체험된다. 영생은 자신을 영원히 사리지게 하는 삶을 통하여 체험된다. 죽기 전에 죽을 수 있는 인간, 남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인간, 그대는 정말 행복하다. 그대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기에.

예수는 생의 마지막에 '당신을 죽인 삶'을 최종적으로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죽음)는 그분 생애의 마지막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분의 생애 처음부터 그분의 생애 안에 늘 일어난 일을 최종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처음에 제자들은 그분께서 남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이미 다 바친 삶을 사셨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위대한 사랑은 없다.” “목숨을 잃으면 얻을 것이고, 버리면 얻을 것이다.”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받아먹어라”는 말씀들을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분은 당신 생의 마지막에 ‘당신을 죽인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신다. 당신 생애 마지막에 일어난 골고타의 사건은 당신의 생애 중에 항상 일어난 일, 곧 늘 당신 자신을 죽이는 삶을 최종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제자들은 한참 후에 그분의 삶을 깨닫게 된다. 이로써 그들에게 인생의 과제도 주어졌다. 그들도 이제 그분처럼 죽고 부활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분처럼 기적을 일으키면서 살아야 한다.


*이 글은 이제민 신부가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주관하는 <삶의 신학 콜로키움>에서 발제한 내용을 필자가 다시 보완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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