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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정체성 상실의 시대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03 조회수557 추천수10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2년 나해 사순 제2주일 - 정체성 상실의 시대

 


 

몇 편의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밥을 먹기를 거부하고, 폭력적이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과 사귀지도 못하고, 언어발달도 지체되는 등의 많은 문제가 있는 다양한 아이들이 나왔고 그들은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신기하게 정상의 아이들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양한 문제의 다양한 아이들이 등장하는 것에 비해서 그런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변화되면 그만입니다. 엄마가 조금 더 아이에게 관심과 애정을 주고, 아빠가 조금 더 참으며 아이와 놀아주면 문제가 있는 아이들은 전부 보통 아이들처럼 변해갔습니다.

여기에서 ‘폭력보이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방영되었던 언어발달 미숙으로 공격성이 매우 컸던 민석이라는 아이가 변화되는 장면은 코끝이 찡할 정도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와 대화해 주지 않아 언어발달이 늦어졌고, 결국 아무와도 소통이 되지 않아 마지막 수단인 폭력으로 아이들과 선생님, 부모님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민석이의 문제는 바로 어머니의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떼어놓고 일을 하기 위해 핸드폰을 쥐어 주었고, 아버지는 아이와 노는 것을 힘들어해 역시 핸드폰을 쥐어주고 TV만 보았습니다. 물론 핸드폰을 먼저 쥐어주었던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이제 아이가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스마트폰뿐이었고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낯선 사람도 그것만 보여주면 앞뒤 안 가리고 쫓아갑니다. 부모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그런 아이들은 이렇게 쉽게 세상의 다른 것들에 지나친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먼저 부모가 변화되었습니다. 핸드폰을 치워버리고 어머니는 많은 칭찬과 애정을 민석이에게 보여주었고, 아버지는 무뚝뚝한 표정을 버리고 우스운 가발을 쓰고 민석이와 놀아주었습니다. 그러자 핸드폰을 찾지도 않고 폭력성도 싹 사라졌고 다른 아이들과도 사이좋은 민석이가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유일하게 필요했던 것은 부모님의 관심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몇 년째 계속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자살률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가 많은 사회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의 경쟁 사회구조 문제라고 합니다. 혹은 경제가 너무 어려워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현재 경제문제로 가장 많이 거론되고 있는 그리스나,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은 가난한 나라 아이티는 자살률에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자살률이 높은 것은 아직까지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 살아야하는가?’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근본적으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야하는가?’의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이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마치 우주에 붕 뜬 사람처럼 불편하고 불안하고 발붙일 곳이 없는 불안감에 싸여 살아가게 됩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의 관심을 확인받기 위해 부모를 귀찮게 하는 이유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출처를 모릅니다. 그냥 자아를 인식하게 될 때에 이미 세상에 던져진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정체성을 갖고 싶어서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줄 사람은 오로지 부모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열매라면 무슨 열매인지는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알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자신이 나온 바로 그 뿌리, 부모를 찾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그 아버지, 어머니가 자신의 뿌리인지 어떻게 확신을 가지게 될 수 있을까요? 존재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버지, 어머니의 애정을 시험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귀찮게 하는 것인데, 그 욕구를 채워지지 못할 때는 심한 불안감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 불안을 잊기 위해서 무엇에든 집착하게 되고 막무가내의 성격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체성의 위기는 사춘기 때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는 몸도 부모님보다 커지고 힘도 세지고 아는 것도 부모보다 많게 되어 자신의 뿌리인 부모가 자신들보다 더 작게 보이게 됩니다. 정체성이란 자신의 뿌리를 알고 어디로 돌아가야 함을 아는 것인데, 사춘기 때는 아무래도 자신들이 돌아가야 할 원천이 부모로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이나 이성, 혹은 게임 등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친구들로부터 배신을 당했다고 느꼈을 때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절대적인 고독감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너한테는 예수님이 함께 계신데 뭐가 걱정이야?”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아무런 의식도 하지 않았던 그 진리, 이것이 붕 떠있던 저의 발을 다시 땅에 붙이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변모하십니다. 제자들은 도대체 그 분이 하느님인지 인간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이지만 조금 있다가는 인간 중 가장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무 위에 달려 죽어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비켜가게 하소서.”라고 하시며 죽어야 할 당신 운명을 받아들이기 힘겨워하십니다.

이 때 예수님을 도와주는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유아기를 거칩니다. 자신의 뿌리가 이스라엘인지 이집트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그러나 결국 참 부모가 이스라엘임을 깨닫고 이집트인을 죽입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사춘기를 겪습니다. 이스라엘 인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이방인 여인과 혼인하여 살아갑니다.

그러고 있을 때 불붙은 떨기나무를 봅니다. 자신의 참 성소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공자는 ‘지천명(知天命)’이라 하였습니다. 즉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서 이집트에서 구원해 내는 일입니다. 물론 결국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는 하지만 믿음이 완전하지는 못하여 가나안 땅 안으로는 이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40년 동안은 하늘의 뜻을 알고 살았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다시 시나이 산의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지금 자신처럼 죽음의 땅인 이집트, 즉 영혼들이 갇혀있는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사춘기를 벗어나 하늘의 뜻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그의 아내 이제벨의 잘못을 지적하며 몇 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게도 하고, 또 갈멜산에서는 바알의 예언자 450명과 대결을 하여 그들을 칼로 쳐 죽입니다. 이렇게 세상과 싸워 승리하고 모세가 하느님을 만났던 시나이산으로 향합니다. 물론 40일간의 여정에 천사가 나타나 빵과 물을 주며 그의 기운이 회복되도록 도와줍니다. 결국 모세와 마찬가지로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제자 엘리사에게 자신의 능력을 남겨놓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중에 아버지께 가시기 위해 엘리사로 대표되는 교회에 당신 권능을 맡기시고 승천하시는 예표입니다.

 

이 두 예언자가 말하는 단 하나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하는데, 하느님께 돌아가기 위한 방법은 바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 부모를 알아 그 부모로부터 왔고 그 부모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유아기 때입니다. 사춘기 때는 그 부모를 벗어나 참 부모인 하느님을 인식하고 그 분께로부터 나와 그 분께 돌아가야 함을 아는 것이 사춘기의 방황을 종식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믿음을 키워나간 것과 같이, 엘리야가 40일 동안 광야를 걸은 것과 같이 죽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결코 아버지께 다다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길을 걷고 난 후에는 아버지께 영광스럽게 다시 돌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과 같이, 엘리사와 그 제자들이 엘리야의 대를 잇는 것과 같이, 교회가 새로이 탄생되어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게 되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아버지는 이런 결정을 내리는 그리스도에게 참된 정체성, 즉 당신의 아드님이 되심을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 타볼산은 내려오시는 모습은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땅 이집트로 들어가는 모습과, 시돈 지방에서 숨어살다가 아합과 이제벨,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과의 싸움을 하기 위해 갈멜산으로 향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마치 어린왕자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뱀에 물려야 했던 것처럼,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 뱀에 물리기 위해 내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뱀은 결국 그 분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지만 동시에 그 발꿈치에 머리를 밟히게 됩니다 (창세 3, 15). 그렇게 그리스도는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 사탄의 무리에 갇혀 있던 당신 백성들을 구해내십니다. 죽음의 문턱을 지키고 있던 사탄의 머리가 부셔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든 뜻을 이룬 아드님을 당신께로 불러올리십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부여받는 이들의 운명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당신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기 전까지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그 일이 완수되기 전까지는 이런 모든 일들을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분께서 승천하시고 난 이후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도 적어도 한 번은 타볼산에 올라 내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선택해야하는 그런 시간이 반드시 필요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40이란 숫자가 이제는 아버지의 뜻을 위해 나의 뜻을 죽여 가는 시간을 의미함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40과 가장 가까운 이미지는 ‘십자가’입니다. 누구도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한 주간도 나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더 따랐습니까? 그래서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습니까? 그러면 이제 39일 남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흔들림 없는 정체성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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