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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회가르침 부활 / 이제민신부님 부활관 [분별]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05 조회수914 추천수0 반대(0) 신고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 (마태,마르,루카)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마태,마르,루카)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다 (마태,마르,루카)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주장 (사도행전 23, 8) ]  그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해서는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않았느냐? ..."  (부활논쟁; 마태, 마르, 루카)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처럼 사방을 파먹어...이자들은 진리에서 빗나가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몇몇 사람의 믿음을 망쳐 놓고 있습니다. <2티모테오 2, 17 - 18>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사도신경>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교리서 643> 그리스도의 부활을 물리적인 차원을 벗어난 어떤 것으로 해석하기는 불가능하며, ...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저녁에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마르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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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교회교리서 /  부활 >


<교리서 298>  하느님께서는 무에서 창조하실 수 있으시므로, 성령을 통하여...그들에게 영혼 생명을 주실 수도 있으며,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로마 4,17)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에게 부활을 통하여 육신 생명을 주실 수도 있다.

<교리서 366> 교회는 각 사람의 영혼이 ─ 부모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셨고, 불멸한다고 가르친다.
죽음으로 육체와 분리되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으며, 부활 때 육체와 다시 결합될 것이다.

<교리서 62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히브 2,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 안에서 당신 아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도록”(1코린 15,3) 마련하셨을 뿐 아니라, ‘죽음을 맛보도록’, 곧 죽음의 상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순간과 부활하신 순간 사이에 그의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상태를 경험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상태는 그분께서 묻히시고 저승에 가신 신비이다.

<교리서 366> 죽음으로 육체와 분리되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으며, 부활 때 육체와 다시 결합될 것이다.

<교리서> 하느님(성자)께서는 자연 질서에 따라 죽음이 영혼과 육신을 갈라놓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그러나 스스로 삶과 죽음이 만나는 장소가 되시고자, 부활로써 육신과 영혼을 다시 결합시키셨다. 이는 죽음으로 생기는 자연 분해를 멈추게 하시고, 당신 스스로 분리된 부분들을 위한 결합의 근원이 되심으로써 이루어졌다.

<교리서 990> ‘육신’이라는 용어는 연약하고 죽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육신의 부활’은 죽은 다음에 불멸하는 영혼뿐 아니라 우리의 “죽을 몸도”(로마 8,11)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가리킨다.

<교리서 997> ‘부활’이란 무엇인가 - 육신과 영혼의 분리인 죽음으로 사람의 육신은 썩게 되지만 그의 영혼은 하느님을 만나, 영광스럽게 된 그 육신과 다시 결합되기를 기다린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으로, 예수 부활의 능력을 통해, 우리 육신을 우리 영혼에 결합시키심으로써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을 육신에 돌려주실 것이다.

<교리서 999>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하셨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루카 24,39).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로 돌아오셨다는 것은 아니다.

<교리서 1003>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된 신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천상 생명에 이미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3,3). ...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되면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콜로 3,4).

<교리서 1016> 죽음을 통하여 영혼은 육신과 분리되지만,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변화된 육신을 영혼과 다시 결합시키심으로써 우리 육신에게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을 돌려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영원히 사시는 것처럼 우리 모두도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다.

<교리서 1052>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 중에 죽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 죽음 뒤의 저세상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고 믿습니다. 이 영혼들이 그들의 육체와 다시 결합되는 부활의 날에 죽음은 결정적으로 정복될 것입니다.”

<교리서 2816> 하느님 나라는 우리보다 먼저 있다. 그 나라는 강생하신 ‘말씀’을 통해서 다가왔으며, 복음 전체를 통하여 선포되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도래하였다. 하느님 나라는.... 성찬례 안에서도 우리 가운데 펼쳐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를 당신 아버지께 드릴 때, 하느님 나라는 영광 중에 오게 될 것이다.



<이상 더 많은 '부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교리서에서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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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민 신부님의 '부활' 주장 >



이제민 신부 “우리가 믿는 부활은 없다” 시체는 되살아나지 않는다  이제민 신부는 “부활메시지가 단순히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이 이 다음에 부활해 천당에 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슬픔도 고통도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부활을 ‘죽음 다음에 오는 삶’으로 고정시키고, 예수의 부활마저 ‘그분의 시체가 되살아난’ 것으로 여기고 이를 증명하려 든다고 비판한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죽기 전에 부활의 삶을 산다는 뜻이다. 즉, “부활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다.”

이제민 신부는 “죽음으로 내 인생은 모두 끝난다. 다시 살아나는 삶은 없다”고 단언하며 부활이란 죽은 자의 문제가 아니라 산자의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죽은 자들이 가게 된다는 저승(천국이라 부르든 극락이라 부르든)을 나는 믿지 않는다” 며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후(死後)’는 ‘인생 다음’이 아니라 ‘인생 중’에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믿는다.

이제민 신부는 “우리보다 앞서 죽은 이들이 지하세계에서 부활을 기다리며 누워 있다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상상일 뿐이다. ... 우리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 나라에 맞갖는 삶을 ‘지금여기’에서 살아야 하며, 그 안에서 부활의 기쁨을 맛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생은 자신을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삶에 주어진다고 말했다.

“부활한 자는 자기를 죽임으로써 사랑의 삶을 산다. ..천국은 자기만 잘 살려고 남을 사랑하는이기적인 자들이 모인곳이 아니다. 이런사랑을 죽일 때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  

이제민 신부는 우리가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고백만으로는 부활의 삶을 살 수 없다고 강조한다. 교회가 ‘믿음’의 이름으로 저희들만의 영복을 위해 모일 때 종교의 타락이 시작된다고 믿는 이제민 신부는 “이런 맹신과 광신의 집단이 인간을 오류로 안내한다”고 비판했다.

죽은 다음에 올 육신의 부활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은 사는 동안에 무덤을 파는 일일 뿐이다.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것, 이렇게 제 몸으로 부활한 몸을 느낄 수 있는” 부활의 삶을 미루지 말고 당장 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하자고 권한다.



나는 천국이든 극락이든 저승을 믿지 않는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여 가게 된다는 저승(천국이든 극락이든)을 믿지 않는다.  이 신앙은 세상을 사랑하게 한다.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저승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부활신앙은 복음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된다. 세상을 떠나야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복음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살아나는 삶은 없다. 죽음으로 내 인생은 모두 끝난다. 다시 살아나는 삶은 없다. ..그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도 인간이 죽으면 육은 땅에 묻히고 영은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된다는 식의 사고에 젖어들게 되었다. .. 이것이 ‘육신의 부활’을 이야기하게 된 배경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부활을 도로 그리스 식으로 받아들여 ‘육신의 부활’을 영과 재결합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육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기에 영만의 부활이나 영과 육의 재결합을 모른다. 부활을 깨닫기 위해서는 영과 육, 생과 사가 하나의 실재를 이루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사멸하는 육을 지닌 존재지만 불사불멸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영원한 존재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이다.

나는 산 자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산 자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부활은 살아 있는 동안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산 자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덤에 묻힌 시체가 다시 살아나 영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은 의미하며 동시에 산 자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후’는 ‘인생 다음’이 아니라 ‘인생 중’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나는 ‘사후’를 믿지 않는다. ‘사후’란 없다. 그렇다고 ‘사후’에 대한 이야기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후’의 세계는 생물학적인 목숨이 끝난 다음 펼쳐지는 세계가 아니다. ‘사후’는 ‘인생 다음’이 아니라 ‘인생 중’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죽은 다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인생이 끝난 다음’ 사흘의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후’는 인생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며 또 이 시간 안에 일어나게 해야 하는 일이다. 부활은 죽기 전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고, 죽기 전에 일어나야 할 사건이다. 인간은 죽기 전에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분은 당신 생의 마지막에 ‘당신을 죽인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신다. 당신 생애 마지막에 일어난 골고타의 사건은 당신의 생애 중에 항상 일어난 일, 곧 늘 당신 자신을 죽이는 삶을 최종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들도 이제 그분처럼 죽고 부활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분처럼 기적을 일으키면서 살아야 한다.






<참고>... 이제민 신부님 부활관의 상기 내용은 교리서와 차이가 있는 부분을 위주로
본 게시자가 줄여서 정리한 것이다. 원문은 자유게시판에서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상기의 게시글 71628번 ㅡ 이제민 신부님의 부활관 결론 [죽음 숭배] ㅡ 필히 참조 

소순태 (sunsoh) (2012/03/05) : [인간은 사멸하는 육을 지닌 존재지만 불사불멸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영원한 존재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이다.] <----- 그리스도교 세례의 필요성/의미/역할/기능를 제거하는, 여기서 주장하는 "예수님의 복음"은, 가톨릭 보편 교회가 전통적으로 정의하는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Christ)"의 정의(definition)와 동일하지 않고, 대단히 많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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