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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09 조회수654 추천수0 반대(0) 신고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루카 15, 22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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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다. 그 이전의 복음 말씀을 보면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 말씀이 있다. 모두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에 관한 비유 말씀이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 이며, '되찾은 은전의 비유'에서는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이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 는 말씀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먼저 문자 그대로 본다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실제가 아니다. 둘째 아들은 죽었던게 아니며 다시 살아난 것도 또한 아닌 것이다.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는 말이 훨씬 더 어울린다 하겠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접할 때에는 반드시 문자 그대로를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의 영성적 의미도 있고 또한 말씀의 우의적 의미도 있다 하고 교회는 가르친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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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서 115  성경의 의미는 오랜 전통에 따라 자구적 의미와 영성적 의미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중에서 후자는 우의적(寓意的) 의미, 도덕적 의미, 신비적 의미로 다시 세분된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경 읽기는 이 네 가지 의미들의 심오한 조화로써 더욱 생생해지고 풍요로워진다> 

[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
는 말씀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신 '육신의 부활'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라고 표현되었다 해서 '죽기 전의 부활이지 죽은 후의 부활은 없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육신의 부활은 인간에게 <죄의 삯인 죽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신 하느님의 생명>을 얻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구원계획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불교처럼 죽음에 대한 초월적인 피안의 세계, '무의 도'가 아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 꺼내어 보고자 한다. 그는 00그룹의 비정규직 교육장이었었다가 그룹 구조조정에서 직책이 변동하게 되자 중국교포 부인은 집문서를 가진 채로 도망가고 말았다. 그는 갑작스런 혼란의 깊은 구렁에서 자살을 결심하였으며 실제로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지만 성모 마리아가 불현듯 생각이 나서 천주교회를 향하였다. 그동안 그의 인생의 목적은 오직 단 한가지 성공과 출세였다.하지만 완전히 그 반대로 꺼꾸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왜관 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우연히 한 권의 책(많은 여러 책들 가운데서)을 손에 쥐게 되었다. 책을 읽다가 그 안의 성경말씀이 자신에게 생명으로 감동을 일으켰으며 인간(나머지 삶)을 해석해 주었다고 한다. 이에 앞서 그는 한달, 두달을 경주 보문단지 호수가를 거닐면서 방황했는데 배가 고파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의 김밥이라도 주어 먹으려고도 했지만 아이들이 흘린 김밥이라고는 일체 없었다고 한다. 주린 배를 움켜 쥐고 피정의 집에 들어선 것이며 한 권의 영성 책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2코린토서 4, 10, 11>] 그리고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 20>] 그리하여 그는 이미 (자살 의도에서) 죽은 자라고 생각했다. 자기 안에 자신이 없어졌고 이제는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 뿐이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부활이다고 여겨왔다. 그의 삶은 예수님의 생명(다른 이의 생명)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자기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남겨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허나 그는 이를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신 부활이다고는 단정짓지 않는다. 회개의 삶 혹은 재생의 삶이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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