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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15 조회수1,042 추천수16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3월 15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He who is not with me is against me,
and he who does not gather with me, scatters.
(Lk.11,23)



제1독서 예레미야 7,23-28
복음 루카 11,14-23

얼마 전, 차를 운전해서 어느 곳을 가는데 길이 너무나도 막히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걸어서 가는 것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소비되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길이 막혀 꼼짝달싹 할 수가 없을 때에는 정말로 화가 많이 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차를 버리고 걸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지요. ‘차’라는 것은 먼 거리를 빠른 시간 내에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데, 오히려 늦은 시간에 답답한 공간 안에서 불편함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있었던 예비신학교 모임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요. 중고등학교 학생들인 예비신학생들의 개강 미사가 봉헌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꽤 많은 학생들이 요즘 많이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렇다면 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원래 목적은 무엇일까요? 바쁜 현대인들에게 시간이 부족해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도록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담은 것이 스마트폰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시간을 아껴 쓸 수 있어야 하는데, 학생들은 이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채팅을 통해서 시간을 오히려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약속 시간에는 하나같이 늦습니다.

어제 뉴스를 보다가 인터넷 안에 ‘맞짱 카페’라는 것들이 있어 문제라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 카페를 통해서 싸움을 주선하기도 또 가르치기도 하면서 폭력을 조성하고 있답니다. 하긴 자살 사이트도 있어서 자살을 유도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파괴하고 있다고 하지요. 사실 인터넷은 세상의 흩어진 정보를 얻음으로 인해 더 넓은 세상을 만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과는 전혀 다르게 생명을 파괴하는 폭력이 만연하게 나타나는 등 부정적인 모습만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문명의 이기들을 잔뜩 누린다고 해서 행복할까요? 세상의 온갖 정보들을 다 알고 있으면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문명의 이기들에서 벗어나 있을 때, 그리고 모르는 것이 더 많을 때 행복했음을 깨닫습니다. 실제로 이번 1박 2일 동안 여행을 하면서 비록 컴퓨터도 할 수 없고 텔레비전도 볼 수 없었지만, 영적으로는 더 풍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현대 문명의 이기들이지만, 오히려 이것들에 지배당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렇게 인간 편리에 의해 만든 것들에 지배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주님 편에 서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세상의 편에 서서 주님을 반대할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편에 서서 세상의 것들을 반대할 것인지는 우리들의 판단과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편에 설 때에만 참된 행복이 있음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시지요. 물론 주님의 편이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주님 곁에 나아가기 힘듭니다. 그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 주님 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는 세상의 것들에 지배당하지 않고, 철저히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에서만 가능합니다.

 

좋은 말 한 마디는 한 권의 책보다 낫다(쥘 르나르).


산에서는 차를 탈 수 없어 천천히 걸어가야 할 뿐입니다. 그러나 더 풍요롭습니다.



할머니와 손자
 

할머니가 네 살짜리 손자에게 색깔을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아가야, 이 전화기는 무슨 색이지?”

“노랑색요.”

“그럼 저 화분은 무슨 색일까?”

“갈색요.”

할머니는 손자의 대답에 흡족해하며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럼 저 시계는 무슨 색깔일까?”

그러자 손자가 지겹다는 듯이 말했지요.

“할머니, 저에게 계속 물어보지 말고, 할머니도 유치원에 가서 배우세요. 금방 배울 수 있어요.”

말이 됩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할머니가 몰라서 물어본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질문을 통해 손자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으며, 손자의 귀여운 행동들을 보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한 것이지요.

어쩌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능력과 힘이 없어서 우리의 소원에 제대로 응답하신다는 식으로 하느님을 낮게 평가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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