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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통[시련]이 많은 그 곳에 사랑이 충만히 내립니다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15 조회수547 추천수0 반대(0) 신고

사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어서 죄가 죄로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5, 13 ; 20 - 21>



두 가지의 고통

인생의 삶을 살다보면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시련을 당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삶에서 시련과 고통이 없다면 그것은 인생이 아닐 것입니다. 진정한 삶이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인생의 삶에는 시련과 고통이 철저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시련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면 그 고통의 시련을 피할 수 없으며 반드시 감당해 내어야만 합니다. 만일 고통의 시련을 피하고자 거기서 달아난다면 인생의 끝이 되어집니다. 그것은 언제나 자신에게 매달려 따라 다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한 점에서 언제부터인가 소리없이 다가 온 시련의 고통을 차마 이기지 못한 나약한 자신의 심성과 의지는 결국 고통과 시련의 포로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은 그것으로 부터 도무지 달아날 수 없습니다. 고통의 시련은 언제나 인생을 따라다니는 긴 끈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인생에는 고통의 시련이 어김없이 인간을 향하여 찾아옵니다. 시련의 고통을 겪게 되면 인간은 그의 포로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자신이 바로 포로된 감옥이며 고통의 감옥 안에서 시련의 사슬에 묶입니다. 그러면 신앙은 어디로 갔는지 조차 기억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을 찾지 못하면 점점 더 고통의 포로로써 결박되어 갑니다. 물론 '신앙의 세계'에서 고통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 뒤따르는 시련이 있는가 하면 신앙에서도 그보다 더한 고통이 신앙을 따라 다닌다고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가지의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세속적인 고통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적인 고통입니다.

두 가지 시련의 고통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겪는 상심은 회개할 마음을 일으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을 후회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속적인 상심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2코린토서 7, 10>]  즉, 한 고통의 시련은 육적인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차원에 있는 시련의 고통으로써 서로 다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의 고통은 '그리스도적 고통'이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다음은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구원에 이르는 고통"에 담긴 그리스도적 고통의 가르침입니다

[구원은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또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고통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을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세상에 당신 아들을 주셨습니다.  "주신다"는 말씀 자체가 이 해방은 외아들 그분에 의하여 그분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 아들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이며 인간을 위한 사랑, 구원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적 고통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고통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차원은 구속의 차원입니다. 외아들 그분이 인류에게 주어진 것은 일차적으로 결정적인 악에 대항하고 결정적인 고통에 대항하여 인간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원의 사명을 띠고 보내심을 받은 하느님의 아드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악을 바로 그 뿌리에서부터 쳐부수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이 악의 뿌리들은 죄와 죽음이라는 땅 속에 뻗쳐있었습니다. 죄와 죽음은 영생을 상실하는 장본입니다. 외아들의 사명은 죄와 죽음의 정복에 있습니다.
죄가 태초 이래로 현세의 역사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비할데 없이 드높은 사랑을 통하여 아드님을 "내어 주심"으로써 이분께서 바로 인간의 악의 뿌리 자체를 쳐부시고 인간의 고통의 세계 일체에 구원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게 하셨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고통의 세계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의 활동은 일차적으로 고통 속에서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분은 육신의 고통이든, 영혼의 고통이든 인간의 모든 고통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고통을 바로 당신 자신에게 받아들임으로써 인간 고통의 세계에 다가오심을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 오해를 받는 일을 겪으셨을 뿐아니라 점점 더 소외를 당하고 적의에 둘러싸이게 되셨으며 자기를 죽이려고 계획하는 음모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으며 죽음(십자가 사랑)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바로 이 고통을 수단으로 하여 그분은 인간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인류 역사와 인간 영혼에 뻗어 내려있는 악의 뿌리를 쳐부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의 구원하는 능력을 의식하면서 당신 자신의 고통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고 고난의 잔을 마시며 아버지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이 사랑 안에서 아버지께 일치되어 계셨습니다. ... 아버지께 대한 일치의 사랑으로써 모든 죄의 악을 스스로 짊어지고 받아 들일 수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적 고통 속에서 죄들이 불식되고 죽음이 제거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더불어 모든 인간 고통이 새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악의 경험이 비할데 없이 그리스도의 고통을 결정지었으면 이 그리스도의 고통이 구속의 댓가가 되었습니다. 구속자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인간 각자 모두가 구속사업이 성취되게 한 그 고통에 참여 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누구나가 자기 자신의 고통을 겪으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고통을 인간에게 열어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이 당신의 구속적인 고통 속에서 모든 인간 고통에 동참하는 분이 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발견할 때 또한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고통도 재발견하게 되어 새로운 의미로 풍부해 지게 됩니다.그리스도의 고통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계속 살아 있으며 특별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살아있고 발전하고 있으며 이 차원에서 인간 고통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결합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고통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자기 품 안에 그리스도의 고통의 신비를 안고 있습니다.]



고통이 많은 그 곳에 사랑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신앙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고통입니다.  고통의 감옥 속에 묶여 있는게 아니라 고통의 굴레에서 해방을 성취합니다. 그 해방은 '그리스도의 사랑' (사랑의 결합)에 의해서 고통의 사슬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한 가운데서도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고통의 시련들을 이기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적 고통이란 예수님께서 먼저 시련과 고통의 댓가를 치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통을 자기 몸으로 채우는 사람은 결코 걱정하여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분의 은총과 그분께 대한 믿음만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되어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은총으로 선택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이 더 이상 은총일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11, 5 - 6>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1코린토 1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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