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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살기위하여 - 3.16.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16 조회수409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2.3.16 사순 제3주간 금요일 호세14,2-10 마르12,28ㄱㄷ-34

 

 

 

 

 




살기위하여

 

 

 

 

 



오늘은 ‘사랑’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문득 영아원에서 일하는 자매의 말이 생각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1-2살 영아도

  자기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지는 본능적으로 알아요.”

 

 
본능적으로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말 이전에 온 몸으로 반응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삶-사람은 같은 어원입니다.

사랑하며 살아가기에 비로소 사람이란 말입니다.


사랑은 우리 삶의 존재이유입니다.

작년 책 출간 전 출판사 사장 형제님의 간곡한 청원을 잊지 못합니다.

 


“사람이야기가 없습니다.

  하느님 이야기만 있어 재미가 없습니다.

  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 같습니다.

  제발 사람 이야기 좀 써주십시오.

  어찌 사람 사는 수도원인데 사람이야기가 없겠습니까?

  신부님이 하느님 사랑에 목숨 걸고 살듯이 저는 목숨을 걸고 책을 만듭니다.
  98% 완성도를 갖췄다 해도 2%가 부족하여 실패입니다.”

 


형제님의 진솔한 고백이 신선한 충격이었고 이에 공감해 심기일전,

저를 비롯하여

수사님들과 수녀님들에 대한 아홉 분의 사람이야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참 재미있습니다.

첫째가는 계명을 물었는데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만으로 부족하신지 이웃사랑을 추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 많은 율법조문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사랑해야 한다.’

단호한 명령이요 의무조항입니다.


사랑해야 삽니다.

살기위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살기위하여 밥 먹듯이 살기위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함께 갑니다.

사랑은 하나이지만 대상은 하느님과 이웃 둘입니다.

어느 한 쪽을 소홀히 해도 안 됩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맹목이라 얼마 못가 변질되고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공허하여

필시 광신의 사랑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바로 하느님과 이웃 사이에 내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정체성의 위기 자존감 위기 시대라 합니다.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할수록

정체성 또렷한 삶에 자존감 높은 참 나의 삶입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이자 존재이유입니다.

나-사랑은 허무요 나+사랑은 충만한 참 나의 실현입니다.


사랑 없어 텅 빈 허무와 무의미한 삶이요

사랑 있어 텅 빈 충만, 의미 있는 삶입니다.

 


우선적인 게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찾아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갈림 없는 마음으로 젖 먹던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도 잘하는 비결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사랑 있으면 저절로 기도하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은 추상적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구체적으로 온갖 수행을 통해 이웃 사랑을 통해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듯 기도하고 일하고 환대하고 공부하고 이웃을 대합니다.

 


하느님 사랑 있을 때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회개입니다.


회개에로 부르시는 자비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호세아서의 내용이 참 좋습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부단히 하느님께 돌아오는 게 회개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회개하여 사랑의 하느님을 찾습니다.



주 하느님께 돌아와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이어 회개에 따른 고백의 응답입니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제물보다도 마음에서 바치는 통회의 입술 기도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할 분은,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하느님뿐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회개에 뒤따른 이런 하느님 체험입니다.

이어 하느님 사랑의 축복입니다.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 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스라엘 믿는 이들에게 선사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 있어 마를 줄 모르는 사랑이 가능합니다.

 


이래서 교회의 사랑의 성사, 성체성가 미사전례가 고맙습니다.

주님은 사랑의 샘입니다.



미사를 통해 사랑의 성체를 모심으로 샘솟는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율법학자의 다음 대답도 음미할 만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

 


번제물과 희생제물이 상징하는바 교회의 미사전례입니다.

사랑의 삶을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지

결코 번제물과 희생물의 전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삶과 미사전례 역시 함께 갑니다.

역시 전례 없는 삶은 맹목이고 삶 없는 전례는 공허합니다.

 


전례기도의 목적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요

주님을 만나 업그레이드되어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주님 사랑으로 충전되고 정화, 성화되어야

일상에서의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의 삶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의 슬기로운 대답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전례에 참석하는 것 역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미사전례에 충실하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충실 할 때

바로 거기가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항구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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