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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18 조회수687 추천수8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3월 18일 사순 제4주일




For God did not send his Son
into the world to condemn the world,
but that the world might be saved through him.
(Jn.3,17)




제1독서 역대기 하권 36,14-16.19-23
제2독서 에페소 2,4-10
복음 요한 3,14-21

어제 새벽, 휴대전화가 정신없이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아니 몇 시인데 전화야?’하면서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입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를 하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해 하면서 전화를 받았지요. 전화기 너머에는 저와 친한 그리고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선배 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조 신부, 자고 있었을 텐데 미안해. 이 근처에서 모임이 있었거든. 모임 끝나고 집에 가려고 하니까 너무 멀어서 그냥 조 신부에게 하룻밤 신세 좀 지려고. 괜찮아?”

짜증이 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저는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가 저를 기억해주었다는 것도 고마웠고, 또한 저 같으면 하룻밤을 재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신 것이니까요.

상대방이 나를 믿어준다는 것. 이것만큼 고마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를 믿어주는 상대방을 위해 자신 역시 최대한의 노력을 하려할 것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의 마음이 이러한데, 우리에게 늘 최대한의 사랑을 주시려는 주님께서는 어떠하실까요? 당신을 믿고 당신의 뜻에 맞게 생활하라고 그렇게 많은 표징을 보여주었음에도, 불신과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기울여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과 달리 당신께 굳은 믿음을 보여주고, 당신의 뜻에 맞게 철저히 살아가는 그 모습을 얼마나 사랑스럽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얼마 전, 온 국민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끝났습니다. 40% 이상의 시청률을 넘어섰다는 것만 보아도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마지막 부분을 보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합니다. 천적들도 죽고, 가까이에서 주인공에게 큰 도움을 주는 사람 역시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있지요. 바로 주인공입니다. 대부분 주인공은 드라마의 끝까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인공이 죽으면 드라마가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은 내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인공을 살 수 있을까요?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과 사랑의 삶을 통해서만 주인공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여기에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주인공의 삶을 선택해서 사십니까? 아니면 이 짧은 세상에 대한 욕심으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엑스트라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선택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 실천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다수가 아니라 나에게 중요한 어떤 사람들이다(은희경).


어제 강의를 갔던 아차산성당을 못찾아서 근처 어린이대공원 주차장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대공원 땅도 밟아보네요.



사랑이란?
 

상대가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저 나의 일방적인 기대에 불과합니다. 나 역시도 상대의 기대를 온전하게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잊은 채 상대가 항상 나의 기대에 맞춰주기를 요구합니다. 때로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상대에게 대신 밀어놓고는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원망을 그에게 전가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언어 습관을 살펴보면 얼마나 자연스럽게 또 일방적으로 기대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 정도밖에 못하니?”, “어떻게 신부님이 저럴 수 있어?”, “어쩌면 넌 친구라면서 그럴 수가 있니?” 등등...

흔히 말하는 어떻게 누구누구가 이럴 수 있는가라는 표현에서 보듯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대하기를 당연시하고, 그 기대를 꼭 충족시켜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상대도 나에게 그런 기대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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