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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20 조회수974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3월 20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Do you want to get well?"
"Get up! Pick up your mat and walk."
(Jn,5.6,8)


제1독서 에제키엘 47,1-9.12
복음 요한 5,1-16

저 멀리 목성에서 온 외계인이 가게에 들어가 10만원어치 물건을 샀습니다. 그리고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과 우리나라의 화폐 단위로 따지면 100만 원쯤 되는 목성의 화폐(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쓸 수 없습니다)를 꺼내 보이며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가게 주인이라면 어떤 것을 선택하십니까? 아마 그냥 우리나라 돈인 10만 원짜리 수표를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100만 원쯤 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목성에 가지 않는 한 쓸 수 없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 먼 목성까지 갈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쓸 수 없는 것이라면 아무리 비싼 것이라 말해도 아무런 가치가 없겠지요. 그런데 행복도 이러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행복 역시 우리 인간들이 간직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달리, 불필요한 행복의 조건만을 찾으면서 행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던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못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을 만납니다.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다니, 이 사람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건강해지고 싶으냐?”라고 묻습니다. 당연히 “건강해지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은 엉뚱하게 말하지요. 즉, 물이 출렁거릴 때 못 속에 들어갈 수 없음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벳자타 못이 흔들릴 때 처음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병의 치유를 받는다고 믿었거든요. 하지만 몸이 불편한 자신은 남이 넣어주지 않는 한 스스로 일등을 차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제에 대한 답을 엉뚱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 같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으냐?”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고 있을까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만인데, 사람들은 각종 불행의 조건만을 말하지요. 돈이 없어서, 배운 것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이 불행의 조건만으로는 당연히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조건은 우리들의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행복해지길 원한다면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행복해지고 싶다.”고 자신 있게 말해야 합니다. 세상의 조건들만을 채우길 원한다면 자신의 진정한 행복이 아닌 불행의 조건들만을 찾아나서는 어리석은 자가 될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찾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천장의 유리 막을 느껴라. 그리고 그것을 깨부숴라(비트겐슈타인).


이스라엘의 벳자타 못 유적지.



소인배의 소탐대실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요? 안 돼요!”

스위스 수도 베른에서 특허국 3급 기술사로 일하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2급으로 승진 신청을 했을 때 상급자에게 들은 말이었습니다. 상급자들은 아인슈타인이 재직 당시 저술한 논문으로 훗날 노벨상을 수상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지요. 이 일로 인해 아인슈타인은 여건만 허락하면 언제든 떠날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한 3,000달러쯤 받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히틀러가 야기한 어지러운 정세를 피해 아인슈타인은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에 교수 지원을 하며 희망 연봉을 제시했습니다. 이때 프린스턴은 그가 희망한 액수보다 무려 5배 많은 15,000달러를 제공했습니다. 다른 메이저 대학들이 제공하는 평균적인 급여를 상회하는 수준이었지요. 이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프린스턴을 떠나지 않았고, 그가 보여준 능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급여에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눈앞의 이익과 손실만을 바라보려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긴 안목으로 바라보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쫀쫀하면 구원 못 받는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습니다. 구원을 받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팍팍 실천하는 사람이지요. 이러한 사람이 쫀쫀하겠습니까? 그 순간에는 자기만 사랑을 실천하니 억울한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 훗날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를 생각하면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적은 노력으로도 얼마나 큰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 먼 훗날 주님 앞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떠올려보세요.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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