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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의 믿음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20 조회수399 추천수0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세상 속 신앙 읽기
송용민 지음

2. 세상 속 하느님
예수님의 믿음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

언젠가 학술 심포지엄에 참여했다가 종교인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학계에서 유명한 분들과 종교인들이 참석 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신부 복장을 하고 있는 나한테 먼저 말을 걸며 자신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본래 천주교 신자였는데, 여러 종교에 관심이 많아서 천주교 피정과 영성수 련은 물론 불교의 참선, 원불교의 수행법과 요가, 마인드컨트 롤 등 해볼 수있는 것은 다 해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을 내기를 모든 종교에서 좋은 요소들을 다 뽑아 하나의 새로운 영적 수행법을 개발했는데, 그게 '마음 수련'이라는 것이다. 알 고 보니 그가 항간에 유행처럼 번졌던 마음 수련원을 창설하고 대중에게 영적 휴식을 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사람 이었다. 얼핏 보기에 종교들이 가진 장점만 모으면 더 멋진 종교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더욱이 요즘같이 현대인이 겪는 정신적 공황을 생각하면 영적 평화를 이끌어줄 어떤 대안 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그가 마음 수련원을 창설한 것도 따지고 보면 가톨릭이 가지고 있는 맹점을 잘 알고 있었 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톨릭 신자 대부분은 세례를 받으면 주일미사 참례를 신자의 중요한 의무로 생각할 뿐, 주일미사 이외의 다른 영적 수행방식을 배우거나 접할 기 회가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지나면 습관적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신앙생활에 쉽게 염증을 느낀다. 가톨릭 신자 증가율이 높다고는 하지만, 날로 높아지는 냉담 률을 생각하면 신자의 양적 증가가 그렇게 반가운 것만은 아닌 듯하다. 가톨릭 신자 가운데 미사참례나 봉사활동에 싫증이나 면 다른 종교에서 운영하는 다양한 영적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 는 경우가 많다. 이미 불교의 템플스테이에 참여한 가톨릭 신 자도 적지 않다고 한다. 물론 종교적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들이 다른 종교의 구도적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의 신앙 성숙에 도움이 될 수도 있 다. 하지만 많은 경우 가톨릭 신자로서 정체성을 잃고 방황할 때 만나는 다른 종교 전통은 자신의 신앙생활에 적지 않은 혼 란을 가져다 준다. 우리나라와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통로인가에 대 한 물음도 있을 수 있다. 꼭 교회에 나가야 구원을 받는 것인지, 예수님 말고 부처님이나 공자의 가르침, 이슬람교의 알라신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는지 물을 수 있다. 만일 이런 고민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 예수님 은 어떤 분이신가?' 하고 자문해 보는 것이 좋겠다. 마치 예수 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 16, 15) 하고 물으신 것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신앙생활을 해 온 가족이나 동료 또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신앙인들에 대한 호감 때문에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것을 생각하면, 이 질문은 진지하게 자신의 신 앙을 되돌아 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내가 그리스도 인이 되었다는 뜻인데,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구원자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라 는 짧은 말 속에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고백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2천 년의 시간을 넘어 과거의 역사적 인물인 예수님이 어떻게 나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느냐는 물음은 성숙한 신앙인이 라면 한번쯤은 고민해야 할 물음이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 다는 체험을 과연 해 본 적이 있는가? 구원이란 본래 어려움과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을 말 하는데, 영적 의미로 본다면 억압에서 해방되고, 병과 상처에 서 치유되고, 두려움과 고통에서 자유와 평화를 얻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났던 성경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인생에 새 로운 빛을 비춰주신 예수님을 통해 참된 치유와 해방을 맛보았 다. 수십 년간 앓아온 중풍병자, 사람들한테 외면당했던 나병환 자와 로마의 앞잡이로 내몰렸던 세리들, 가난 때문에 몸을 팔 던 창녀와 간음하다 걸린 여인, 부모를 잃은 고아들, 남편의 도 움을 받지 못하던 과부들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은 그야말로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린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위로와 치유는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였을 뿐 아니라, 도외시하던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 구원자로 고백될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죄악과 죽음 의 고통을 넘어 하느님 사랑의 궁극적 승리를 가져다 주셨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단 순히 교회의 구성원로서 친교를 나누거나 교회 안에서 취향이 맞는 신자들과 여가를 즐기는 것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그리 스도인은 예수를 만난 성경의 인물들처럼 자신의 삶 속에서 구 원을 체험해야 한다. 열심한 신자들은 자신이 찾는 희망의 원천을 예수님의 말씀 과 행적에서 찾는 사람들이다. 물론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서도 삶의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의 절대성과 고유성은 다른 종교적 신념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예 수님은 단순히 위대한 말씀과 기적을 일으킨 영웅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고 섭리하며 세상 끝날까지 인류의 역사를 완성 하실 하느님 현존의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표징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모든 종교적 신념이 추구하는 인간의 궁 극적 완성, 곧 고통과 죽음을 이기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 하는 길,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놀라운 신비를 자신 의 삶을 통해 보여주셨다. 만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이 세상 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내셨다면 바로 그분이 예 수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우리 믿음의 중심이어야 하다.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이태석 신부는 자신이 사람들 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을 많이 가졌다는 생각으로 아프리 카 오지의 사람들에게 달려가 하느님 사랑을 몸으로 보여 주었 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우리가 겪는 현실의 모순과 고통 속 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살고 있다는 확신에서 시작 된다. 그리스도교처럼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비교할 수 없는 사랑 이 세상 안에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실천적으로 증거하는 종교 는 없다. 교회 역사에서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이 예수 그리스 도라는 한 사람의 인격 안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그를 믿는 이들의 삶 속에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여전히 그리스 도인으로 사는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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