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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26 조회수750 추천수12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2년 나해 사순 제5주간 화요일 -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자신의 신변안전에 남달리 신경을 쓴 인물이 있었습니다. 과테말라 대통령 알폰소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대통령 관저를 중심으로 반경 2KM안에 있는 건물은 무조건 관저 쪽으로 난 창문을 폐쇄시켜 버린 사람입니다. 이런 인물이니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한 극성이 오죽했겠습니까? 그가 취한 몇 가지 조처를 살펴봅시다. 친위대를 제외하곤 어느 누구도 무기를 휴대한 채 자기 관저에 출입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주치의는 하루 세 번씩 그를 검진했고 어떤 물건이라도 친위대의 엄격한 사전 검사 없이는 절대로 관저 안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음식물은 검사관이 시식한 다음이라야 그의 식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조처만가지고는 자신의 신변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당시 150만 불이라는 거금을 지불하고 대통령 전용의 방탄차를 구입했습니다. 이 차는 기관포로 습격을 당해도 끄떡없도록 설계된 것인데 경호용으로 완벽한 것으로 알려진 차입니다. 그런데 이 방탄차를 인수하고 한껏 기분이 좋았던 그 다음 날 평소에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친위대원의 총탄을 맞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무서워해 만리장성을 쌓고 불로초를 찾았던 진시왕도 50세에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또 얼마 전에 끝까지 살기 위해 벙커 어두운 곳에서 쏘지 말라며 빌다 죽어간 카다피도 기억합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도 죽음이 두려워 벌벌 떨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 속했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 세상의 것들을 추구했고, 또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잃기 싫어 어떻게 해서든 이 세상에 남아있기를 원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난해지고 병들고 죽는 것을 즐거워하며 산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미안 신부를 다시 되새기고 싶습니다. 그는 나병환자들이 격리 수용된 지옥과 같은 환경의 몰로카이 섬에 33세의 나이로 들어갑니다.

그는 그곳에서 12년간 나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들이 숨을 거두면 그는 살이 짓뭉개진 육신을 앞에 놓고 기도하였고,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다미안 신부는 목욕을 하려고 물을 데우다가 실수로 뜨거운 물을 발등에 쏟았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 그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끓는 물에 데었는데 아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각의 상실, 그것은 확실한 나병의 증상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 저도 저들과 같이 문둥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저도 저들과 똑같은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저들도 알 것입니다. 제가 저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그리고는 그 전까지 강론 때, “사랑하는 나의 형제 여러분...”이라고 시작했지만, 이젠 자랑스럽게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문둥병자 형제들이여...”

옛 순교자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지금도 세상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에겐 죽음이 휴식이고 자신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기다려지는 시간입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그렇게 기쁘게 하느님께 나아가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에 살았지만 이 세상에 속한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당신이 가시는 곳에 그들이 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당신은 아버지 나라에 속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판공을 하다 보니, 이 세상에 속해있던 우리들이 고해성사를 보며 다시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해성사가 바로 새로운 세례이고 부활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육신만 다시 살아난다면 그것은 완전한 부활이 아닙니다. 다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부활한다면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보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죄를 이긴다는 뜻입니다. 결국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죄 속에서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행복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어느 쪽에 속해야 더 행복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기에 이 세상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주님께 손을 내밀면 다시 하늘나라에 속하게 되고, 유다처럼 죄에 머물기 원하면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는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함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을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통로를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벗어나 영원한 삶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다른 세상에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릅시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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