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3.30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예레20,10-13 요한10,31-42

하느님의 침묵

살아갈수록 말도 줄어들어 저절로 침묵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루 중 꼭 필요한 말만 한다면 대부분은 풍요로운 침묵일 것입니다.

오늘은 침묵에 대한, 하느님의 침묵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좋을 때가 많습니다.

말의 위로보다도 말없는 침묵의 위로가 마음을 적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 말보다 더 깊은 마음을 전하는 침묵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본원에서 회의 시

아빠스님의 시작 기도를 대신한 성모송이 참 편안했습니다.

침묵이 된 말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늘 해도 지루하지 않고 새로운 성모송입니다.

예전 독일에서 총회 때 총 아빠스님의 시작 기도 때

‘자비송’이 또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지치고 피곤하고 한계에 봉착했을 때

침묵과도 같은 말의 자비송 기도가 마음을 촉촉이 적셨습니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가 침묵을 깨지 않고 침묵이 되듯이

이런 짧은 교회의 공식적 기도문들은

침묵을 깨기는커녕 침묵을 깊이 합니다.

이뿐 아니라 매일 바치는 시편성무일도, 미사경문의 기도문들 역시

자연의 소리 같아 한결같이 풍요롭고 깊은 침묵으로 이끌어 주며

하느님의 침묵에 닿게 합니다.

예전에 본 ‘사막에서 길을 묻다’라는 책 제목에 이어

지금 읽고 있는 ‘나무에게 길을 묻다.’라는 책 제목도 의미심장합니다.

사막 같은 세상에서

나무에게 길을 물어 길을 찾아가는 구도자 인생을 상징합니다.

사막과 나무가 상징하는바 침묵입니다.

말없는 말

가득한 사막의 침묵을, 나무의 침묵을 통해 하느님의 침묵에 닿습니다.

모든 침묵의 귀착점은 하느님의 침묵입니다.

여기서 들리는 하느님의 음성이요 깨닫게 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침묵과 고독을 사랑하고

침묵과 고독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침묵과 고독의 깊이에서 만나는 하느님이요

사람 누구나 이런 갈망이 있습니다.

산 중에서 홀로 살아가는 시인의 소식이 알려지자

도회지 생활에 지친 이들이 자주 찾는다 합니다.

이 또한

‘높고 외롭고 쓸쓸한’ 고독과 침묵을 찾는 원초적 갈망의 표현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침묵은

허무의 진공 상태가 아닌 하느님의 현존이요,

하느님의 연민이요,

물끄러미 바라보는 하느님의 눈길입니다.

하느님의 침묵에 좌절할 게 아니라 끝까지 주님을 찾아야 삽니다.

이래서 침묵과 고독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기도입니다.

침묵은 그대로 기도가 되어 하느님의 침묵에 닿습니다.

1독서의 예레미야의 처지가 사면초가이며

하느님의 침묵이 그 배경을 이룹니다.

‘마고로 비싸빕’ ‘사방에 공포가!’ 외치지만

하느님은 요지부동 반응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침묵의 하느님입니다.

침묵의 깊이에서 만나는 하느님입니다.

침묵과 고독 없이는 삶의 깊이도, 하느님과의 만남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며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침묵 기도 중에 주님을 만난 예레미야의 고백이요

이어 또 기도하는 예레미야입니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송사를 맡겨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주십시오.”

깊은 침묵의 기도 중에 주님을 만난 예레미야는 모두를 주님께 맡깁니다.

이어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에서 터져 나오는 찬미기도가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그러나 마음은 참 변화무쌍하고 변덕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 이어지는 다음 예레미야(20,14)의 고백입니다.

“저주를 받아라, 내가 태어난 날!

  복을 받지 마라,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

 
참으로 치열하고 처절한 내적전쟁 중의 침묵의 기도입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은 이런 처지에 공감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침묵의 내적기도 중에 정화되고 심화되는 내면이요

마침내 마음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복음의 예수님 역시 사면초가의 처지에 있으며

하느님의 침묵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이런 처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소명의식입니다.

아버지께 파견 받아 아버지의 일을 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소명의식입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침묵 중에도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소명의식, 사명의식을 새롭게 해야

사면초가의 어려움 중에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어느 분의 책 서문의 다음 말마디도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사실 이런 작업은 오랜 인내와 특별한 소명의식을 필요로 한다.

  인내와 소명의식이 없었다면

  애당초 이 작업은 생각할 수도 시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침묵 중에도

끊임없는 ‘기도와 일’이 있어 또렷해지는 소명의식, 사명의식이요,

이런 의식이 받쳐줘야 항구한 인내도 가능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침묵과 고독을 사랑합니다.

이런 침묵과 고독은 그대로 사랑의 기도가 되고

이런 침묵과 고독의 깊이에서 만나는 주님이십니다.

매일 아침 깊은 고요 중에 거행되는 이 거룩한 미사에서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