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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31 조회수700 추천수13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3월 31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You know nothing,
nor do you consider that it is better for you
that one man should die instead of the people,
so that the whole nation may not perish.
(Jn.11,49-50)



제1독서 에제키엘 37,21ㄴ-28
복음 요한 11,45-56

요즘 어린이의 인터넷 중독은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을 갖고 놀면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부모나 형제들의 스마트폰을 늘 접하다 보니 손쉽게 인터넷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지요. 육아카페를 보면 어린이의 스마트폰 중독 현상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4~5세 유치원생이 식사 중에도 스마트폰을 놓지 않고, 엄마가 이를 뺏으면 울고불고 난리가 난답니다. 이런 애들은 결국 초등학생이 되면 하루 5~6시간씩 컴퓨터에 본격적으로 매달리며 게임을 하게 되고, 이러다 점점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으면 불안·초조해져 일상생활에 장애를 겪는 중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는 자기 아이가 어린데도 이렇게 복잡한 스마트폰을 가지고 논다고 마치 천재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오히려 점점 주의력 감퇴 등의 인지기능 및 학습능력이 떨어지고, 대인관계에도 큰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하지요.

스마트폰을 예로 들었지만 어쩌면 이 뿐만 아니라 이 사회 전체가 그러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칭찬, 인정, 성공, 명망, 권력 이라는 것에 길들여지면서 중독되었고 이 맛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눈치만을 보면서 자신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실패나 실수, 남들의 비난이나 비판 따위의 조짐만 보여도 두려움을 느낀다면 분명히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지요. 또한 자신이 중독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죄악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 역시 이렇게 권력에 중독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이제껏 누리던 권력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했던 이들은 드디어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아주 엉뚱한 곳에서 찾지요.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이 말은 완전히 억지지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왕으로 추대하게 될지 모르며, 그렇게 되는 날에는 로마의 군사력을 자극하게 되어 이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할 것이며, 더 나아가 자기네들 민족을 유린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생각하지 않았고, 그분을 따르던 군중들도 생각조차 않았던 일을 어마어마하게 꾸며대는 정치극인 것입니다.

바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부귀영화라는 중독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이렇게 합리화시키지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

자기 자신이 빠져 있는 중독을 먼저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롤 합리화시킬 뿐, 주님의 뜻에 맞춰 하지 못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제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져서 주님 안에서 참 행복을 찾아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신형철).


어제 특강을 했던 고잔성당. 새롭게 지어진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성당 안에 납골당까지 해 놓았습니다. 혹시 관심있으신 분들은 연락을...



아름다움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좋은 글을 발견하여 이곳에 그대로 적어 봅니다.

어느 현명한 왕이 여러 철학자들과 왕궁의 테라스에 앉아 아름다움은 어디에 존재하는가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뜰에서는 왕자와 고관의 아들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왕은 자신의 충직한 하인을 불러 보석이 촘촘히 박힌 모자를 주며 말했습니다.

“이 모자를 저기 뛰어 노는 아이들 가운데 네가 보기에 가장 잘 생기고 아름답게 보이는 아이에게 씌워 주거라.”

모자를 받아든 하인은 가장 먼저 왕자에게 씌워 보더니 다시 벗겨 말쑥하게 생긴 고관의 아이에게도 씌워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마음에 썩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 값진 옷을 입고 있는 여러 아이들에게 돌아가면서 모자를 씌워 보았지만 그곳에 있는 어느 아이 하나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모자를 씌웠습니다. 그가 보기에 옷은 누추하지만 그래도 자기 아들에게 모자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모자를 씌운 채 아들을 왕에게로 데려갔습니다.

“폐하 모자가 가장 잘 어울리는 아이는 송구하게도 소인의 자식인 듯하옵니다.”

그러자 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철학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들, 잘 보았는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눈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라네.”

감동의 글이 아닙니까? 이 글을 보며 이러한 생각을 해 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눈만으로 참된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에는 주님께서 주신 진정한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까요? 사랑의 마음 없이는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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