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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상처 받는 교회, 상처 주는 교회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31 조회수398 추천수1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세상 속 신앙 읽기
송용민 지음

3. 세상 속 교회
상처 받는 교회, 상처 주는 교회

언젠가 잔뜩 화가 난 신자 한 분이 성당에서 동료들에게 울 분을 토로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말인즉, 본당신부의 처사 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적어도 천주교 신부 라면---.'이란 전제 아래 쏟아내는 비난은 모두 신부들한테 받 은 상처에 대한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신부도 사람인데---.' 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에게 사제는 하느님 같 지는 않아도 보통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는 맹신(?)이 있기 때 문인지도 모른다. 반면 사제가 신자들한테 받는 마음의 상처도 적지 않다. 좋 은 칭찬 뒤에는 항상 비난이 따르기 마련, 사제들이 아무리 열 심히 사목을 하고 신자들을 위해 전심을 기울여도 그 가운데는 열심하지도 않으면서 잔뜩 비판만 하는 이들이 있다. 내 동료 신부 중에는 기도생활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열심한 이가 있다. 그런 그를 두고 어떤 신자는 선임 본당신부보다 기 도생활이 게으르다고 남모르게 비난하더라는 것이다. 뭘 해도 비난받는 삶 때문인지 어떤 사제들은 신자들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아예 동굴로 피신해서 신자들과 담을 쌓고 사는 이들도 나온다. 솔직히 교회를 비판하는 일은 쉽지만,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 하는 것은 어렵다. 가톨릭 신자가 된 기쁨보다는 미운 신자들 을 핑계로 교회에 등을 돌리기도 하고, 개중에는 자신이 바라 는 것을 누르면 곧바로 나오는 '자동판매기형 신앙'을 즐기는 신자들도 있다. 하느님께 봉헌된 사제나 수도자들조차 교회에 상처를 주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바라기도 한다. 교회에서 받은 상처는 오래 기억하지만, 내가 교회에 준 상처를 기억하는 일 은 드물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하여 남미와 유럽 전역에서 사제들의 아동 성추 행 때문에 로마 교황청이 몸살을 앓은 적이 있다. 교황님은 이 례적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들이 교회에 준 상처를 고백하고, 상처 받은 신자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교회가 죄를 지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문화가 다른 한국교회에서는 좀처럼 이 같은 문제가 부각되지는 않지만, 사제들의 신원 의식의 변화는 근래 에 적지 않는 도전이 되고 있다. 상처는 죄의 결과지만 동시에 용서 이후에도 남는 기억의 아 픔이다. 사람 사이의 상처와 마찬가지로 교회 또한 상처 받고 상처를 줄 수 있다. 제도교회가 신앙이란 이름으로 절대 권력 을 휘두르며 신자들을 강요하고, 그 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 를 준 역사가 있는 반면, 수많은 세속 권력과 신앙에서 일탈된 신자들한테 상처 받은 교회의 역사도 있다. 교회의 잘못을 솔 직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청한 역사도 있고, 박해와 편견 속에 서 신앙을 지켜낸 순교의 역사도 있다. 교회는 단순히 기도하는 장소이거나 나의 능력과 재주를 뽑 내고 인정받는 장소가 아니다. 내가 싫으면 떠나고, 미우면 욕 을 하는 대상도 아니다. 교회도 상처 받는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생명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시며 당신 제자들에게 맡기신 '살아 있는 돌'이다. 교회 를 성령께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라고 하는 것은 우 리가 아무리 뭐라 해도 교회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져 '저승 의 세력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뜻하기 때문 이다. 동시에 그분의 뜨거운 마음이 교회 안에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비록 교회가 상처 받고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교회 안에는 이 상처를 씻고 기워주는 이들,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이 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여전히 건재하다.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에 수많은 죄과가 있음에도, 2천 년을 넘도록 한결같이 존 재해 온 것은 교회를 사랑하며 자신을 봉헌한 적지 않은 사제 들과 신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 현존을 깨닫고 말없이 교회에 봉사하며 살아가는 이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이들의 보속과 희생이 있기에 상처 받 은 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조금만 주변을 눈여겨보면 남 몰래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이들, 곧 하느님의 백성을 볼 수 있다. 그들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 울 정도다. 상처투성이인 교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교회는 정말 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일까? 어려운 물음 앞에서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신 다는 것이다. 아니 그분은 포기하는 법을 모르신다. 서로 상처 주고 상처 받는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결코 내치지 않 으신다. 우리가 그분을 외면해도 그분의 짝사랑은 멈추지 않는 다. 내가 부족한 사제로 살면서도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을 삼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그분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교회 안에 머물고 있는 나를 사랑하신다. 마치 미워도 인연을 끊을 수 없는 부모처럼, 싫어도 함께 지내야 하는 배우자처럼, 못나도 내 자식인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와 맺은 인연에 충실하 시다. 그것이 내가 교회에 헌신하고 머물러 있는 이유다. 내가 비록 죄인일지라도 상처 받은 교회를 위해 교회를 사랑해야 하 는 이유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자. 성 체 없는 가톨릭교회를 상상할 수 없다면, 사제 없는 가톨릭교 회 또한 상상할 수 없다. 비록 부족하고 인격적 결함이 있어도 우리가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사제들 이 사랑받는 만큼 그들이 신자들을 향한 열정도 커지기 때문이 다. 어쩌면 이 점은 한국교회가 받은 축복이자 선물인지 모 른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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