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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2년 4월 1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마르15,1-3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2-04-01 조회수1,053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2년 4월 1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마르15,1-39)

성주간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 한 주간을 말한다. 성주간의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마지막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주님 부활을 맞이하도록 이끌어 준다. 교회의 전례에서 성주간은 전례의 정점을 이룬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미사를 봉헌한다. 미사 전에 성지를 축복하고 행렬을 한다. 미사 때에는 긴 수난 복음을 듣는다. 성주간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특별한 예식이 없다.
성목요일 오전에 각 교구에서는 교구장 주교의 주례로 교구 사제들이 다 함께 ‘성유 축성 미사’를 봉헌한다. 이 미사 중에 사제들의 서약 갱신이 있다. ‘재의 수요일’에 시작한 사순 시기는 성목요일 저녁에 봉헌되는 ‘주님 만찬 미사’ 직전에 끝난다.
저녁에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주님 만찬 미사’가 봉헌된다. 이 미사 중에 ‘발 씻김 예식’이 있다. 미사가 끝나면 성체를 수난 감실로 옮기고 제대포를 벗기며 제단 중앙에 있는 십자가도 치우거나 천으로 가린다. 신자들은 수난 감실에 모신 성체 앞에서 밤을 새워 조배하며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한다. ‘주님 만찬 미사’로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되며, 이때부터 ‘예수 부활 대축일’ 저녁 기도 때까지를 ‘파스카 성삼일’이라고 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마르 11,1-11; 마태 21,1-11 ; 루카 19,28-38 ; 요한 12,12-19)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성주간의 첫째 날이다. 전례는 사순 시기의 분위기와 뚜렷이 대조된다. 성지를 축복하고 행렬을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재현한다. 이는 그리스도 임금의 개선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날 거행하는 성지 축복과 행렬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와 올리브 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한 데서 비롯한다. 이 행사는 4세기 무렵부터 거행되어 10세기 이후 서방 교회에 널리 전파되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전례에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며 주님을 우리의 임금님으로 모시게 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 수난의 신비를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며 우리가 겪는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오늘의 묵상]

인간은 누구나 갈등을 안고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웬만해서는 작은 갈등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외칩니다.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을 비관하고, 하느님께 항의하기도 합니다.
물론 힘겨운 갈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만’이 그런 갈등 속에 빠져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갈등 역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크고 깊은’ 갈등이라면 그만큼 ‘크고 무거운’ 십자가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누구나 갈등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 누구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갑니다. 수난 복음 역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알리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휘청’거리셨습니다. 힘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힘들지 않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고통스럽지 않는 갈등은 없습니다. 크고 무겁더라도 작고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은총으로 가는 길입니다.
자신의 마음이면서도 자신이 ‘모르는 마음’이 있습니다. 억울하게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달리 생각할 수 있건만 억울한 쪽으로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그런 결정에 연관된 사람을 떠올리며 벽을 쌓습니다.
언젠가 보복할 것이라는 생각마저 합니다. 무서운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은총이 오게 해야 합니다. 선한 생각이 햇볕처럼 스며들게 해야 합니다. 성주간 동안 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수난 성주간 첫날인 성지주일 아침에,

저는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이 한 말이 자꾸만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 이셨다." 라고 했는데
그는 뭘 보고 그랬을까?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은 저 예수가 울부짖으며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바타니?"~하며 숨을 거뒀는데 말이다.
오늘 복음의 첫머리에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아의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시는 장면(14,3)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여자들도 있었지요.
예수님은 평소에 소외되고 당시에 버림받은 계층들과 함께 그들의 아픔과 동참했어요.
그들의 아픔을 치료하고 병을 고쳐주며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당시의 기득권을 가진 종교와 정치의 합작아래 어쩌면 미운 오리새끼인냥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 가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리는 겁니다.
죄목도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
빈정대는 죄목이지요.
자칭 왕이라고 고치라고 까지 했쟌아요?
그렇게 죽어간 한 죄수를 두고 왜 백인 대장은 그가 진정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을까?...............

저는 이렇게 묵상해 봅니다.
왜? 내가 정치범이냐? 내가 뭘 잘못했냐?
저놈들이 그랬지 내가 야냐?~~
소리를 버럭 지르고 싶은게 솔질한 나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마디도 원망을 안 하시네요. 다만 아버지께 간구하시며~
아버지께만 매달리시네요. "엘로이 !  엘로이! "~~~
성경에는 큰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15,37)라고 합니다.
저도 잠시 그 상황으로 함께 해 봅니다.
함께 부르짖어 봅니다. 내 심령안에서 큰소리로요.
"엘로이 !  엘로이! "~~~

레위기 1장에 보면 번제물에 관한 대목이 나옵니다.
번제물이란 속죄 제물로서 하느님께 모두 살라 바치는 제사이지요.
남김없이 싸그리 태웁니다. 국물도 없지요.
저는  '올인'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모리야 산에서 제물로 바칠때
분명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올인'했어요.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께 '올인'하고 계십니다.
그럼 나는?~~~~~
뭘로 '올인'할 수 있을까.
말로만 주님뜻대로 하세요. 합니다.
아~~로마노 언제쯤 주님 앞에 철이 들려느냐....

다시금 뇌까리며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함께 외쳐 봅니다.
"엘로이 !  엘로이! "~~~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 16,15.16)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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