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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붇는 마리아(요한 12,1-1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2-04-02 조회수1,483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2년 4월 2일 성주간 월요일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요한
1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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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신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특별한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예수님께서는 향유를 당신의 발에 붓는 마리아의 행동을 통하여 당신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드러내신다

 ☆☆☆

 마리아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발랐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시편 23편 5절의 이 말씀처럼,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그 사람에 대한 영예의 표시로서 대개 머리에 바르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머리가 아닌 발에 기름을 부음으로써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존경을 겸손한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더군다나 마리아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릴 만큼 주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습니다. 자신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가와 체면은 더 이상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가로막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가치였습니다.
유다는 그 사랑의 마음을 알아보기엔 너무도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허무하게 시들어 버려지는 꽃의 경제적 가치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꽃다발을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경제적 가치를 넘어선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그분에 대한 사랑이 간절하고 지극할수록 우리는 현세의 경제적 가치를 따지는 마음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마리아와 유다 

-김훈일 신부-

 

오늘 마리아는 값비싼 나르드 향유를 가져다가 잔치에 앉으신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엄청난 행동입니다.
우선 향유 가격이 삼백 데나리온이나 된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 한 데나리온이 근로자의 일당에 해당되므로 노동자의 일 년 소득과 비슷한 액수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발에 그냥 부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것을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주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유다는 이것을 아주 못마땅해합니다.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마땅했다고 말합니다. 드러난 사실을 보면 마리아의 사랑은 낭비적이고 유다의 사랑은 현실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지만 유다는 돈으로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사랑의 가치를 잘못 선택한 것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마리아는 그 사랑의 중심에 예수님을 선택했고, 유다는 자신의 선함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잘못된 선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사람들과의 친교의 자리나 활동하는 자리에는 열심히 하지만 기도에는 마음을 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자선을 많이 했다고 해서 헌금을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먼저 선택하고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먼저 선택하고 우리의 삶도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도, 선행도, 기도도, 모든 것이 예수님을 선택한 이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양승국신부-


<아직 눈부신 하늘 아래 살아있기에>


사순절이 시작된 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성주간에 접어들었군요. 우리 죄인들을 위해 고통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어떤 보속을 이행했는지, 이제 곧 떠나가실 예수님께 무엇을 봉헌했는지 가만히 돌아보니 기가 막힙니다. 너무나 의식 없이, 개념 없이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부끄러움에 가슴 치는 성주간 월요일 아침, 주님께서는 한 여인을 남아있는 사순기간의 이정표이자 제 삶의 이정표로 세워주시는군요.


베타니아의 마리아, 그녀의 예수님을 향한 봉헌은 성주간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오빠와 가족 모두를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예수님이 너무도 고마웠던 마리아였습니다.


어느 날, 밖이 소란스러워 나가보니 꿈에도 그리던 예수님과 일행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뛸 듯이 기뻤던 마리아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님, 새 삶을 부여해주신 예수께 어떤 방식으로든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할 텐데, 어떤 것이 좋을까?

마리아는 우선 자신이 지니고 있는 물건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 그래서 가장 애지중지하던 것, 생명처럼 여기던 것이 어떤 것인가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순 나르드 향유였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마리아에게 있어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


이제 머지않아 떠나가실 예수님임을 직감했던 마리아였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과 사랑을 기울여 예수님을 접대합니다.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 가장 극진한 접대의 표시로 마리아는 그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립니다.


예수님의 한없이 감미로운 사랑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 예수님의 무한한 자비를 조금이라도 체험한 사람은 마리아처럼 변화됩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행동양식이 달라집니다. 사고방식이 달라집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탈피해서 온전히 예수님 중심적인 삶으로 변화됩니다. 주변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만이 일생일대의 과제가 됩니다.


극진한 하느님 자비의 체험을 통한 마리아 내면의 변화를 알 리 없었던 유다였기에 이렇게 투덜거리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제대로 된 봉헌생활을 꿈꾸는 분들은 마리아처럼 제대로 된 하느님 사랑의 사랑을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온 세상의 모든 자비를 한 곳에 다 모은다 하더라도 하느님 한분의 자비를 능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화된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저 역시 또 다른 희망을 지녀봅니다. 우리 모두 아직 이처럼 눈부신 하늘아래 살아있기에 마리아 못지않은 변화와 새 출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에 기뻐합니다.


또 다시 다가온 성주간(聖週間), 죄인인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신 예수님 자비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 풍요로운 자비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고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지난 사순절, 돌아볼 때 마다 부끄럽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1주일이란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보다 자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피땀 흘리시는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향한 극진한 그분의 사랑을 조용히 묵상해야겠습니다. 
   

보관중인 강론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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