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너그러워지는 길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4-03 조회수846 추천수15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2년 나해 성주간 화요일 - 너그러워지는 길

 


 

예전에 한 중년 신사분이 찾아와서 아픔을 호소하였습니다. 이 분은 사회에서 성공하고 존경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자살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보복한 아들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아 손이 부들부들 떨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분은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 달라고 그런 이야기를 하였지만, 저는 오죽했으면 아이가 아버지 앞에서 자살을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분도 아들이 하나이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키워보고 싶은 욕망에 아들을 매우 엄하게 키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이 자살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은 아버지가 제공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성적을 포함한 많은 면에 너무 스트레스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어처구니없는 보복의 방법을 선택한 아들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도 분명히 잘못한 점이 있으니 죽은 아이에게 원한을 갖지 말고 용서해 주고 오히려 용서를 청해야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초나라 장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신하들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낮에 시작한 파티가 밤이 깊도록 계속되자 연회석엔 무수한 촛불들을 밝혀 놓았습니다. 이렇게 연회의 흥취가 무르익고 있을 때였습니다. 왕은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는 허희라는 여인에게 여기 참석한 신하들에게 술 한 잔씩 따라드리라고 했습니다. 왕의 특별한 호의였습니다.

한참 허희가 술을 부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일진광풍이 불어 촛불이 모조리 꺼져버리자 연회석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 휩싸여 버렸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누가 허희의 가냘픈 허리를 감아 당기는 것이었습니다. 허희는 순간적으로 그 사람의 갓 끈을 끊어 쥐고 몸을 뺀 다음 왕에게로 달려가 이런 일이 있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왕은 불을 켜려는 시종들의 동작을 제지하면서 말했습니다. 오늘은 군신간의 허물없는 즐거움을 위하여 마련한 자리니 경들은 지금부터 거추장스러운 갓끈을 모조리 끊어 팽개치고 마음껏 술을 들자고 권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갓끈을 끊어버리고 마음껏 즐기다가 돌아갔습니다.

그로부터 수년이 흘렀습니다.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봉을 자청한 당교라는 장수의 특별한 지략으로 예기치 못한 전과를 올리자 왕은 그에게 특별한 상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이미 왕으로부터 한없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 더 이상 상을 받을 수 없다며 그 옛날 연회 석상에서 허희의 허리를 안은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에게 큰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만약 왕이 너그럽지 못하면 신하들은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너그러움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만약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한다면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매우 쉬워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배반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베드로가 하룻밤사이에 세 번씩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도단의 우두머리인 베드로에게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하필 베드로에게 공개적인 창피를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을 품에 안아야 하는 교회의 반석이 될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참다운 교회의 수장이 될 때 자신과 같은 처지의 많은 죄인들을 용서할 줄 아는 너그러움을 심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양들을 잘 치라고 세 번씩 말씀하시며 베드로의 세 번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세 번이란 말이 곧 법적인 효력을 갖는 숫자입니다.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시면서 동시에 세 번 배반한 것을 생각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윗사람이 될수록 포용력도 더 커져야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 무서운 고해 신부님들께 몇 번 혼나서 고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고해를 줄 때도 가끔 화가 날 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 때면 저도 베드로처럼 생각합니다.

그래, 나도 죄 지을 것을 미리 알면서도 이겨내지 못하고 죄를 지었지. 알아도 유혹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이 나약한 우리들이야. 누구도 나라면 저 상황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텐데라고 장담할 수 없어. 베드로도 알면서 죄를 지었으니 나도 저 상황이 되면 아마 똑같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고해주는 것이 매우 편해집니다. 겸손해지기 위해 죄를 많이 지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나도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뻔히 아는 죄도 이겨낼 수 없는 똑같이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은 죄짓지 않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