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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월8일 야곱의 우물- 요한20,1-9 / 렉시도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4-08 조회수348 추천수2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1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제 마음의 어둠을 밝히시어 살아 계신 주님을 알아 뵐 수 있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오늘 말씀의 전前 문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합니다.(요한 19,31­42) 예수님은 십자가 상의 죽음으로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일을 “다 이루셨지만”(19,30) 그분을 따르던 이들한테는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절망의 어둠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신 것처럼 제자들도 절망의 무덤에 묻혔던 것입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곧 주일의 이른 아침은 십자가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의 심문이 ‘이른 아침’에 이루어졌듯이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진 시간이 밝아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18,28; 20,1ㄱ 참조)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한테는 ‘아직도 어두울 때’입니다. ‘어둠’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 제자들의 의혹과 불신의 상태를 나타냅니다.(8,12; 9,4; 11,10; 12,35; 13,30 참조) 이런 어둠을 안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 곁에 서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분의 죽음뿐 아니라 주간 첫날 아침, 어둠과 같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본, 첫 목격 증인이 된 것입니다.(19,25; 20,1ㄴ)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누가 주님의 시신을 가져갔다.’(20,2ㄴ)고만 생각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한 채 제자들을 향해 어둠 속을 달려가지만 이미 그녀한테 섭리의 새날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20,2; 마태 28,6 참조)


마리아 막달레나한테 빈 무덤의 전갈을 들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졌듯이 절망의 어둠에서 ‘밖으로 나와’ 새벽빛을 가르며 무덤으로 달려갑니다.(요한 20,3­4) 그들의 모습에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아가 3,3ㄴ) 하고 찾아 나서는 아가서 여인이 떠오릅니다. 빈 무덤, 곧 예수님의 부재라는 사실에 놀란 제자들은 두려움과 슬픔에 젖지만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은 더 밝을 것입니다.


‘사랑받았다’는 동사가 사도 요한과 예수님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듯 그들은 함께 달려갔지만 요한은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다다랐습니다.(요한 20,4­5) 그러나 그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뒤따라온 베드로에게 우선권을 내어 주면서 베드로의 권위를 존중합니다.(6,68­69; 21,15­19 참조) 사랑받은 사람만이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요한은 다만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봅니다.(20,5) 시몬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아마포’와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이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6­7절) 죽음에서 소생한 라자로는 손과 발이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지만(11,44) 부활한 예수님은 새로운 천상적 실존을 취했기 때문에 아마포와 수건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치워진 무덤 입구의 돌, 아마포,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표징이지만 아직도 어둠에 싸인 그들의 마음은 “누가 주님을 꺼내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고”(20,2ㄴ),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9절) 불완전한 믿음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었다.”(8ㄴ절)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요?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은 작은 표징에서도 현존을 알아보는 능력을 지닙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그분의 모습을 통해(루카 24,30­31),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목소리를 통해(요한 21,6­7) 주님을 알아보았듯이 사랑은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주간 첫날 이른 아침’의 표징을 봅니다.


때때로 우리의 믿음이 ‘빈 무덤’과 같은 어둔 밤에 잠길지라도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는 날, 우리는 새로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간 제자들처럼, 비록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부활 아침이라 해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20,10)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듯이 우리의 불신을 밝히며 먼저 찾아오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19­20절 참조)

묵상
부활 아침입니다. 부활 아침이 어두워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재가 너무 황망해 서러움에 겨운 탓이며, 절망의 어둠 위에 떠오른 태양이 너무 부시어 눈을 뜨고도 볼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제 어둠은 걷혔고, 부활의 빛을 서서히 익혀갈 것입니다.(아가 2,8­14 참조) 그때 비로소 이 어둔 영혼을 비추어 오시는 주님을 “뵙고 믿을 것입니다.”(요한 20,8ㄴ) 그리고 어둠을 밝혀주는 생명의 빛, 그 한가운데를 거닐며 그분의 현존을 누릴 것입니다.

기도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18,24)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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