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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활이 필요한 이유는 새로운 만남을 위해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4-08 조회수769 추천수13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2년 나해 부활 대축일 -
부활이 필요한 이유는 새로운 만남을 위해





 

제 인생을 바꿔 준 책을 대라면 저는 주저 없이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책은 열 권짜리로서 대학 들어가면서 읽기 시작하여 5년 걸려 다 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내용인데,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지금까지 꿈꿔오던 삶을 접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 즉 사제의 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25년 동안 한 번도 사제로 살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던 내가 지금에 와서 결혼도 못하는 그런 삶을 잘 살아낼 수 있을지 두려웠습니다.

이렇게 주저할 때 그 길로 뛰어들 수 있는 결단을 내리게 해 준 책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줄무늬 애벌레는 배춧잎을 열심히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마리의 나비가 훨훨 날며 그들 곁을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는 그 광경에 너무나 매료되어 그만 넋을 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너무 보기 흉하고 처량함에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잠시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가 이내 쓴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먹던 잎을 마저 먹기 시작했습니다.

몸집이 클 만큼 컸을 때 멀리보이는 하나의 기둥이 보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모든 애벌레들이 그 기둥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기둥의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도 친구들을 따라 그 기둥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르다보니 어쩔 수 없이 다른 애벌레들의 머리를 밟아야 했습니다. 처음엔 너무 미안했지만 나중엔 자신을 밟고 올라가는 애벌레들에게 화가 나서 자신도 열심히 밟고 정상을 향해 올랐습니다.

중간쯤 올랐을까, 자신의 발밑에서 ‘아야!’하는 여자 애벌레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신에게 머리를 밟힌 노랑 애벌레는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둘은 나란히 애벌레 기둥에서 내려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다시 기둥의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노랑 애벌레는 자신과 함께 이렇게 살기를 원했지만 결국 줄무늬 애벌레는 다시 기둥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빠르게 올랐습니다.

한 편 노랑 애벌레는 슬픔에 잠겨 어떤 나무 밑을 걷다가 자신 몸에서 실을 뽑아 자신을 둘둘 감고 있는 늙은 애벌레를 만납니다. 그리고 뭐하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늙은 애벌레는 이렇게 누에가 되어야 아름다운 나비로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노랑 애벌레는 믿을 수 없었지만 결국 자신도 누에가 되어보기로 합니다.

어느 날 줄무늬 애벌레는 거의 정상에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구름 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굴러 떨어지지 않게 아슬아슬 자리를 지키는 애벌레들뿐이었습니다. 그 때 아름다운 노랑나비가 줄무늬 애벌레 앞에서 무언가 말하는 듯하였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그 눈빛만은 노랑 애벌레를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노랑나비는 그를 인도하여 자신의 누에고치를 보여줍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자신의 몸에서 실을 뽑아 자신을 감쌉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죽음의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달 밝은 밤에 줄무늬 애벌레는 호랑나비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아니 이제 시작입니다.

 

저는 부활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야이로의 딸이나 나임 과부의 아들, 혹은 라자로의 부활은 참다운 부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시 그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인간이 된 것이고 다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똑 같은 삶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부활은 수준의 변화가 요구됩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아버지와 하느님 대 하느님으로 만나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가까워지기 위해 인간의 옷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애완견을 참으로 사랑한다고 해서 애완견과 인격적인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애완견이 사람이 되지 않는 이상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사람과 애완견과의 차이보다 훨씬 큽니다. 인간이 강아지를 만들 수는 없지만 하느님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다시 태어나야 할 필요성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셨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몸으로 다시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부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온전한 관계를 맺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같이 새로 부활한다면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리라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걷느냐 걷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이것이 바로 애벌레가 자신을 실로 감아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부활이 기다리는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애벌레가 누에가 되지 않고서는 나비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애벌레가 나비와 온전한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부활하지 않으면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부활하기 위한 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르는 것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제자들을 모아놓고 수업을 하기 전에 이런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먼저 앞으로 손을 쭉 뻗고 그 다음은 뒤로 손을 쭉 뻗어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매일 10번씩 이 동작을 반복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지시한 것을 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다 하였다고 대답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다음 다시 물어보았더니 이번에는 한 명이 하지 않았고 이주일이 지난다음 물어보았더니 다시 세 명이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한동안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일 년이 지나서 다시 물어보았더니 단지 한 명만이 그 동작을 매일 반복한다고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청년을 칭찬하며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하였고 그가 바로 플라톤입니다.

보잘것없는 저에게도 무언가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을 다 읽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따라 할 생각도 없으면서 무엇을 배우고 싶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따라하지 않으면 제가 느꼈던 새로 태어남은 느끼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아만이란 사람은 앗시리아의 장수였지만 나병환자였습니다. 나병환자는 더 이상 사람들과 관계 맺을 수 없이 격리되어 살아야 하는 운명입니다. 그가 예언자 엘리사를 찾아왔을 때 엘리사는 문 밖으로도 안 나오고 그저 요르단 강에 가서 몸을 7번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나라에도 더 좋은 강이 있는데 그런 일을 시키느냐고 크게 화를 냅니다. 그러다가 하인의 말을 따라 예언자의 말대로 해 보기로 하고, 그렇게 하니 나병이 나았습니다. 그 때 비로소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이 참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부활이 기쁘십니까? 만약 기쁘시다면 하느님과 더 가까운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그만큼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야합니다. 부활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따를 수 있을 때 매번 새롭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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