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
작성자이유희 쪽지 캡슐 작성일2012-04-08 조회수760 추천수3 반대(0) 신고

성령과 함께 일하며 기도하며

동물의 왕국 자주 즐겨보는 프로이다. 시청하다 보면 하느님 창조의 위대하심을 알아 볼 수 있는 자연의 신비는 언제나 감동적이다. 하루는 원숭이들의 삶을 집중 조명한 프로였는데 원숭이란 녀석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의도된 화면은 아니었고 여러 녀석들이 장난을 치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뛰어다니다 그저 한 녀석이 헛집어서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사실이었구나! 어쩐지 정신없이 까불더라니! 조심하지.

모범택시가 한국에 처음발대식을 시작할 때부터 택시문화 선진화에 앞장서고자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참여하게 되었다. 선진국을 다녀온 손님들께서 으레 칭찬하는 나라는 단연 일본이었다. 서비스 문화가 완전히 정착되고 의식수준이 세계최고라고 공인하는바 우리 서울시에서는 일본 엠.케이 택시를 모델로 정하고 우리에게 합숙훈련을 통하여 의식수준을 바꾸고자 교육하였고 우리역시 시대의 흐름을 감지하고 열심히 배우고 습득하여 택시선진화 사업에 적극적 협조와 노력으로 서비스의 개념을 이해하고 변화에 일조하였으며 한편 친절한서비스에 대한 자부심도 갖기에 이르렀다.

또한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친절과 온유함으로 여러 어려운 상황들을 사랑으로 대처해 나아갔으며 택시기사 25년의 노하우를 통하여 어떠한 손님도 편히 모실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고 즐거운 마음으로 서울의 거리를 누비며 더 나아가 신자로서 복음 선포의 의무까지 실천해 나가고 있다. 물론 부족한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고 작은 실수나 의견충돌도 있지만 거듭된 사과와 대화로서 손님들의 위상을 높임으로서 원만히 해결해 나아가고 목적지에서는 서로 고마운 마음으로 헤어진다.

오늘은 특별히 수입이 좋았다 약간 욕심이랄까 늦은 시간이지만 한분 손님을 더 모시고 귀가하기로 작정하고 취객 한분을 모셨다.

금호동 푸르지오 1차.
아! 네~
금호동이면 방향도 좋구나! 모셔드리고 집으로 가는 길이니 잘됐구나!
그런데 손님~ 푸르지오 1차가 금호동 어디에 있지요?
금남 시장 뒤!
네~
대답은 했지만 생각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래~ 가면서 생각해보자 기억나지 않으면 손님께 물으면 되지 뭐!
내비게이션도 있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손님을 모시고 성수대교를 건너는데 불과 몇 분도 안돼서 손님은 잠들고 말았다.
그런데 성수대교를 건너는데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금남시장까지 와서 손님을 깨우니 꿈쩍도 않는다.
내비게이션으로 푸르지오 아파트를 살펴보니 1차가 확인되질 않는다.
음~ 어떻게 할까? 1차라고 하였으니 제일 오래된 대우 푸르지오 아파트로 올라갔다.
손님을 마구 흔들어 깨우고 다 왔으니 확인 좀 해보라고 하니 겨우 정신을 차리고 두리번거리고는 여기가 아닌데! 한다.
아! 그래요?
마침 경비아저씨가 기웃거리신다.
아저씨! 푸르지오 1차가 어디지요?
모르겠는데요. 이곳에 경비하신지 얼마 안 되시는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손님께 조심스럽고 공손하게 손님! 제가 잘 못 찾겠는데요. 이 근방일 터이니 잘 살피셔서 알려 주시지요 했다. 
손님은 술이 많이 취한 것도 아니고 젊은 사람이고 불과 몇 백 미터 안에 있는 아파트다. 대충 설명하거나 알려줄 마음만 있으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상황이다. 반응으로 보아 작정한모양이다. 눈치로 보아 그러하다.
반말에 욕하고 끔직한 언사를 마구 토해내기 시작한다. 스스로 마음을 진정시킨다. 이럴 땐 내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게 급선무다 내가함께 흥분할 경우 경험상 결과는 항상 좋지 않았다.
마음의 중심이 손님의 언사에 따라 마구 흔들린다.
나를 바라보는 눈은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노는 듯 자신감에 차있고 느글느글 이글거리고 부모 같은 연배의 사람을 무슨 큰 약점이나 잡은 듯 함부로 정말 너무 심하다.

언사를 추려보면 택시 안에 부착돼있는 운전자 자격증에 이름을 읽으며 이유희 길도 모르는 사람이 왜 택시를 하느냐? 심한 욕설과 칼로 찔러 죽이겠다는 등 못하는 말이 없다.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길을 약간 잘못 든 것을 가지고 죽인단 말인가? 나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그래! 난 살만큼 살았으니 찔러 죽여라! 하고 대들었다. 아니 내가 왜 이런 말을 하지 다시 마음을 잡고 손님을 달래보지만 막무가내이다.

차를 돌려 정문으로 나와 정문 수위에게 물어보니 조금가다 좌측이라고 한다. 이제서야 푸르지오 1차가 생각난다. 아! 좀 더 심사숙고 했더라면 좋았을걸! 무슨 자신감에 이 모양이란 말인가? 25년이란 경력에서 아니 자만이란 높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 창피하다.

푸르지오 1차를 향해 방향을 잡으니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좌측우측 지시를 하고 102동 앞에서 내리고 이죽거리는 얼굴로 차비를 2백5십 원을 낸다. 차비를 받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화가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돈 안 받아!
그래? 잘됐네! 하고 아파트로 올라간다.
아! 어떻게 저렇게 컸을까?

집으로 돌아오며 곧바로 잊으려했지만 오는 내내 분함을 참을 수 없다. 떨쳐버리고 잊으려 해도 감정자제가 안 된다. 칼을 들고 그의 심장을 서서히 쑤셔 찌르는 상상과 강한 분노는 내 스스로 섬뜩하다. 아니 어떻게 이런 상상이 자꾸 떠오르는 걸까? 마치 지금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듯한 실천적 감정이다. 정말 경험하지 못한 상상과 분노가 사악함이 어떻게 내안에 이렇게 가득 차 있는 걸까? 내 스스로 내가 무섭다. 혹시 나의 상상력과 분노의 감정을 마귀가 충동질 하는 것은 아닐까? 내안에 원래 이런 악의 요소들이 잠재해 있는 걸까? 그렇지 있으니 올라오겠지!
아! 정말 내가 싫다.
주님! 이 악에서 저를 구해주십시오.

집으로 돌아와 정해진 저녁기도 안에서 나의 잘못을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그를 용서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도대체 편치 않다. 주님과 함께 다시 성찰해본다. 나는 주의 기도를 드리며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하는 기도 대목에서 무엇인가 부족한 면이 있지 않나 생각 들었다. 기도문 낱말들을 하나하나 뜻을 되새기며 그 뜻에 따라 내 마음을 들어 올려 기도 했나 살폈다.

저희라는 낱말에 인식이 부족했음이 드러났다. 저희라는 낱말을 양식을 주시고 까지는 바르게 했는데 그 뒷부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하는 기도 부분에서는 나에게 편중된 매우 협소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음을 찾아내게 되었다. “즉, 나에게 잘못한 이를 내가 용서하오니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이렇게 말은 저희라 하면서 이기적 마음으로 저희를 나에게만 적용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뒤돌아보니 내 마음은 이러했다. 내게 잘못한 이를 내가 용서하면 되었지 내게 잘못한 그를 위하여 하느님께 내가 대신용서를 청할 수 있나? 주제넘은 것은 아닐까? 유혹과 악에서 구원도 본인들이 처한 것을 내가 대신 기도한다고 무슨 결과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내 중심적으로 기도하고 보편교회의 저희라는 개념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는 오래전 아버지로부터 우리 형제들이 잘못으로 인해 회초리를 맞을 때 형을 용서해주세요, 동생을 용서해주세요, 여보! 그만 하세요.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이 버릇없게 왜? 역성을 드느냐고 더 큰소리를 하셨지만 그 효과가 크다는 것을 잘 알고있다. 훈계가 끝나면 매를 그친 아버지도 고맙지만 어머니와 형제들이 나의 잘못을 대신 용서해달라고 빌어주었던 고마운 기억이 난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 바로 사랑이었다. 나는 보편적 기도를 협소하고 편협한 사고로 나만을 위하여 기도드렸음을 알게 되었고 저희를 용서하시고 라는 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는 마음, 사랑의 마음임을 깨닫고 우리도 그렇게 기도하기를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가르쳐 주셨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오늘 만난 그 손님의 잘못과 나의잘못과 모든 이의 잘못을 주님께서 용서해주시기를 보편적 차원의 형제적 사랑으로 기도드렸다. 또한 그럴 수밖에 없는 그의 처지도 변호 하였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듯 평화와 고요가 찾아왔다. 저희라는 생각이 더 넓게 퍼져 나아가며 사랑으로 온 세상이 다 형제임을, 하나임을 생각하며 어느덧 잠이 들고 말았다.

교만과 자만이란 놈은 푸르지오 1차아파트 엘리베이터처럼 제일 위층까지 쉽게 올려주고 또 한 지하실 바닥 까지 쉽게도 사람을 끌고 내려간다. 하지만 하느님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의 죄와 고통을 통하여 가르치시고 이끄시고 온갖 좋은 것으로 다 바꾸어 주시는 분, 하느님 앞에 나의모습 있는 그대로 봉헌할 때에 겸손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야훼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란 풀밭에 이 몸 누여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주 나를 이끌어 주시네.” 성가5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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