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전주의자들에게 신부의 이름은 없다 [사랑의 이름]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4-10 조회수331 추천수0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요한 20,17>

...................................................................


'내 아버지와 너희의 아버지, 내 하느님과 너희의 하느님'에 대하여 결코 다르지 않으신 분이시다는 예수님 말씀이심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굳이 이렇게 표현하신 뜻을 살펴본다면 바로 이 말씀 속에 있는 "내 형제들"이다 하겠다.

예수님 형제들의 아버지는 예수님 형제들의 하느님이시다. 한 하느님 아래 한 아버지를 모시는 ''한 형제들''이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살과 피를 지닌 육신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말씀으로 새로 태어난" 초자연적인 영적인 몸의 한 형제들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그런 형제들인 것이다고 말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만 부활하고, 예수님 형제들은 부활하지 않는 제자들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모두 다같이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부활의 형제들'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요한 14장> 

예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예수님 안에 계신다 하셨듯이 예수님 형제들도 예수님 안에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형제들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요한 5>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여기서 '아들이 원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이다. 아버지의 말씀으로 다시 태어난 이들이며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안에 있는 이들이다. 하느님말씀 안에 있는 이들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 말씀으로 결합된 말씀의 형제들이다 할 수있다 

하느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 안에 있는 말씀과 일치된 이들이 있고, 하느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도 예수님 안에 없는 사람들, 곧 말씀과 일치되지 않은 이들도 분명히있다. '예수님의 어린 양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양들'이 아닌 경우가 실제로 존재한다.

하느님을 바라보기는 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상관없이 예수님을 자신과 같은 한 인간일 뿐으로 여기며 말씀에 결합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성전 생활(율법주의자들)을 중요시 하는 '구약의 유다인들'처럼 처신하고자 하는 '성전중심주의자'들이다고 명명할 수 있다.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성전 생활을 추구하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과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인간을 사랑하며 말씀 생활을 추구하는 이타 중심적인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전의 신앙과 사랑의 생활로 이렇게 나누어서 본다. 

전자는 하느님을 찾아 다니는기는 하지만 오직 자신의 평안을 위해서이고 예수님은 자기 안에 계시지 않는다. 이는 말씀이 자기 안에 없다는 의미이다. 곧 말씀과 동떨어진 사람이다 할 수 있다. 성무일도에 참여하고 영성체도 거의 일상이지만 그분 말씀은 없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전 중심의 행태들은 따라 하지만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행태들은 거부하는 성전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찾지 않는다. 사랑을 찾지 않는다. 자신들을 의롭게 여기는 '의인이다' 한다. 
실제로 이같은 사람을 볼 수 있다. 이 게시판에서 율법주의자들이다고 바리사이들이다고 비난받은 적이 있는 이들이 실제로 존재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에게는 사랑이 실제로 없이 보인다. 주님이신 예수님보다 마리아(자기 마리아)께 미신적으로 대하기도 한다.

성모님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 마리아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보다는 "다른 이름"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자기 마리아'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어린 양들이 아니다. 말씀과 상관없으며 사랑하고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자신과 마리아 뿐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요한>

예수님의 마리아는 사랑의 예수님을 찾는다. 예수님의 어린 양들, 예수님의 형제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의 신랑이시다. 사랑이시다.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랑은 신부의 이름을 부른다.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사랑을 행동할 수 있는 예수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른다 할 것이다. '사랑의 이름'이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