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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복음묵상.유 영봉 신부
작성자원근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04-14 조회수365 추천수3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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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요한복음. 20,19-31

묵상길잡이
현대인들은 실험으로 증명되는 과학적인 것만 믿으려 한다. 그러나 부활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사건은 아니다. 내 눈으로 봐도 믿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서로 공동으로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

1. 토마스 사도는 아주 특별한 사람인가?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증언하는 사도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 사도의 모습을 본다. 토마스 사도는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하는 사도들의 말을 믿기보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며 자신의 눈과 손으로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고자 한다.

토마스 사도는 체질적으로 의심이 많고 매사를 철저히 확인하지 않고는 잘 믿지 못하는 분인가? 아니면 평소에 예수께 대한 신뢰나 믿음이 부족한 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들자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11,16)하고 말 할 정도로 예수께 대한 강한 열정과 믿음이 있었다.

며칠 전에 죽고 묻혔던 스승이 다시 살아 나셨다고 하면 누가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보면 토마스 사도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인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복제 인간의 양산(量産)을 서두르며, 우주탐험을 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연과학적인 사고에 깊이 물들어 있는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 부활, 천당, 지옥, 천사, 악마 같은 종교적 진리에 대해서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2. 부활은 이미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 장면을 찍어 둔 비디오 테입이 있다면, 사도들에게처럼 나에게도 발현해 준다면 나도 믿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눈앞에서 죽었던 부모나 가족이 나타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그의 부활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당황하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충격을 이기지 못해 병이 날지도 모른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는 상식적으로 또 아무리 눈으로 봐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말하자면 부활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부활은 “하느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에도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를 동산지기인줄로 알았고(요한20,13-14),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본 제자들도 예수를 유령으로 착각했다.(루가24,38)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루가24,16)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예수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부활 사건은 신앙의 차원이지 감각의 차원이 아님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의 참뜻을 깊이 새겨야 한다.


3. 부활 신앙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열어준다
오늘 사도행전의 제1독서에는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체험한 원시교회 공동체의 삶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사도4,32-33) 부활을 믿게 된 원시교회 신자들은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가진 것을 공동으로 나누는 자발적인 공산주의(공동생활)를 실현하였던 것이다. 이는 세상 것에 대한 애착을 넘어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활한 예수님의 계속되는 발현을 체험하면서,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재물이나 부귀영화, 쾌락이나 권력 따위는 참으로 하찮은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사도 바오로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3,8) 고 고백하고 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에겐 이 세상의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돈, 쾌락, 권력을 위해 못할 짓이 있겠는가? 보험금 때문에 처자도 부모도 죽이고, 부모 유산 때문에 형제간에 칼부림하고, 실직 당한 남편과 자식들을 헌신짝 버리듯 팽개치고 자기 편하게 살겠다고 훌훌 떠나고, 부정과 비리를 밥 먹듯 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이다. 왜 이 모양인가?

우리가 세상 것에 대한 집착으로, 이기적인 욕심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 아닌가? 참 신앙인은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그 영원한 생명에 우리가 초대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몸소 사신 그 사랑의 삶을 살 때 우리도 그분이 들어가신 참 생명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부활은 매일의 삶 속에서 싹트고 자라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유영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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