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4월15일 야곱의 우물- 요한 20,19-31/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4-15 조회수293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북상

19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로 마음을 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한 ‘주간 첫날 이른 아침’과 이어지는 오늘 말씀은 ‘주간 첫날 저녁’과 ‘여드레 뒤에’ 집에서 여러 제자들한테 일어난 사건을 전하며, 예수님의 부활발현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주간 첫날 저녁, 제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한테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습니다.(20,19ㄱ) 무엇이 제자들을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가놓은 채 어두움에 머물게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행적과는 달리 무참한 십자가 상의 죽음은 그들 자신도 언제 예수님과 같은 죽음으로 내몰릴지 알 수 없는 불안과 불신의 어두움이었습니다. 그 어두움은 오직 ‘생명의 빛’, 곧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만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평화’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지만(14,27; 16,33) 그들의 닫힌 마음에는 평화의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문을 열지 못하는 그들의 나약함과 부족한 믿음, 두려움도 그들 한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가로막지는 못합니다. 그분은 잠긴 문을 열고 오시듯 그들의 마음을 여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십니다.(20,19ㄴ)


예수님께서 제자들한테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실 때, 비로소 그들의 ‘어둠과 닫혔던 마음’이 평화로 넘치며 기뻐합니다.(20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셨지만 부활하여 살아 계신 분이시라는 확신은 제자들의 어둠을 기쁨의 빛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한테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하신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14,18­19; 16,20­24 참조)
믿음에는 사명이 따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명에는 더 이상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평화’와 더불어 ‘성령’이 부여됩니다.(20,21­23) ‘성령’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넘겨주고 또 심장에서 물을 흘려보내실 때 온 세상에 주어졌던 것이지만,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당신의 숨을 통하여 제자들한테 성령을 불어넣으십니다.(창세 2,7; 에제 37,9­10 참조) 이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이들이 지니게 될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사죄권을 지니고 교회 공동체를 거룩하게 정화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활신앙은 예수님의 발현체험을 통해서만 확고해지는 것일까요? 제자들은 토마스한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20,25ㄱ)라고 전하지만, 이를 믿지 못하는 토마스는 어둠의 신앙, 불완전한 신앙을 상징합니다. 그의 완고한 현실주의는 믿음의 눈을 멀게 하여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아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며 새로운 그 무엇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잠긴 문’과 ‘마음’을 열고 오시는 우리의 평화이신(26절; 에페 2,14 참조) 주님께서 “내 손을 보아라.…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하시는 말씀은 비단 토마스에게만 하시는 말씀일까요? 토마스는 자신이 요구했던 증거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은 채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그분 앞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28절) 이제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이요 ‘하느님’으로 새롭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의 부활발현을 전해 들어야 했던 토마스는 사도들의 부활신앙을 전수받는 우리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여드레 뒤’, 주간 첫날 저녁 토마스가 예수님을 만났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현하는 신앙 여정을 계속할 것입니다.(1코린 11,26; 사도 20,7 참조) 예수님께서 토마스, 아니 우리한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그렇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믿는 이들한테 확신을 주고, 새로운 그 무엇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게 하며, 또한 그것을 대면하여 수용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20,25ㄱ)라는 증언이 지니는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요? 단순히 ‘보았다’는 것만으로 신앙이 굳건해지고, 그 누군가에게 증언이 되는 것일까요? 주님을 뵈었다는 것이 그분이 지니신 평화와 사랑을 다시 만난 것이라면, 부활의 증언은 못 자국과 옆구리의 상처가 아니라 제가 지니는 사랑과 평화일 것입니다. 어두움을 넘어 세상을 이기는 주님의 평화와 사랑으로 부활의 빛을 밝히고 싶습니다.

기도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22­23)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