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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불의한 성전주의 [사랑의 형제애를 해치는 요인]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4-15 조회수317 추천수1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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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가 참석하지 않은 제자들의 모임 자리에서 사명을 주십니다. 부활 이전의 공생활 중에서도 하신 말씀이 "너희를 보낸다" 였습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10,3)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세상 속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파견하시어 하느님의 계획을 충만히 계시하십니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지상에 파견하시고 성자께서 성부로 돌아가신 뒤에는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에 의해서 성령께서 사도들과 교회에 파견되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하느님의 생명)을 예수님 안에서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를 미리 정하셨다고 성경은 일러줍니다. 이 하느님의 계획은 성자와 성령의 공동 파견으로 전개되어 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의 고통이 동시에 수반되어 지고 있습니다.

"이리 떼 가운데로 너희를 보낸다"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평탄하지 않는 '사랑의 고통'이 된다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고통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고통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평탄한 삶만을 위하여 성전중심으로 생활하는 '성전의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고통'이 뒤따르지 않는 법입니다.

성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성전 밖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그들의 육적인 '성전 생활'은 하느님께 도리어 불의가 되어지며, 영적으로는 하느님의 계획을 거스리는 사랑의 반대자로서 진리의 불순종으로 멸망을 향해 나아갑니다.교회 안에 있는 '양의 탈을 쓴 이리 떼'는 바로 성전주의자들을 가리켜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성전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어린 양'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속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 당신의 양들을 보내시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성전 안에서 영적으로 움직이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성전에서 맛보는 육적인 감각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적 습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들은 서로 '떼'(무리)를 이룹니다. 서로 협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공동체의 숨겨진 '악의 속성'은 이들의 성전 중심의 육적인 탐욕심에 의해서 일어나고 공동체의 형제애를 파괴시키는 뿌리깊은 원인이 되어지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형제애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치되지 못하고 성전중심의 사적인 이기심과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을 배반한 가식적인 위선으로 공동체에 분란을 일으키는 장본인들이 되어 집니다. 

예수님의 양들은 이리 떼 속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 사랑의 길에서 바쁘지만 성전주의자들은 성전생활을 가지고 형제들 간에 이간질을 일삼기만 합니다 거짓된 육적인 성전중심의 생활은 내부의 다툼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고통이 뒤따르는 '십자가의 사랑'이 일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툼의 욕정만 채워집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육적인 사람은 언제나 육적인 감관이 자신에게 요구됩니다. '영적인' 다시말하면,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전 생활로 취할 수 있게 되어진 육적인 감흥에 맛들려 이것을 채우려 성전 중심으로 움직이는 성전주의자들은 결국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율법을 강조하고 온갖 율법(규정들)을 만들어 내며 그 율법을 판단기준으로 공동체 형제들 간에 이간질을 하면서 형제애를 파괴시켜 갑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중심이 되지 않은 공동체는 사랑의 고통이 없어 예수님의 상처를 깨닫지 못합니다. 실제 십자가의 사랑을 실행하는 이들은 이미 예수님의 상처와 결합하여 보지 않고서도 믿는 것이 됩니다만 성전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일치하지 못하는 양의 탈을 쓴 이리 떼로 변질되어 지고 육신적인 다툼만을 일삼는다 할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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