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사랑하고 싶은 것과 사랑해야 하는 것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04-19 조회수615 추천수2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세상 속 신앙 읽기
송용민 지음

4. 세상 속 사람들
사랑하고 싶은 것과 사랑해야 하는 것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단어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 은 가슴 떨리는 남녀 간의 사랑에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모정 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가슴을 적셔온 최초의 단어이자 최고의 단어다. 그런 탓인지 사랑은 아름답고 신비스럽고 때로 두렵기 도 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이해인 수녀의 시구처럼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이기도 하다. 황홀함과 두 려움이 동시에 쏟아지는 체험이다. 우리가 '하느님은 사랑이시 다.'라고 고백하는 이유도 사랑이 인간이 표현해 낼 수 있는 가 장 황홀한 단어이지, 정작 마주하면 두렵기 짝이 없는 미지의 세계로 나를 초대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잘 알고 있는 두 가지 큰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이웃 사랑이다. 신자들은 '어떻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 잘 안다. 하지만 기도 - 회개 - 희생 - 겸손 - 용서 - 나눔 등 귀가 따갑 게 듣는 실천적 덕목을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괴리감이 적 지 않다. 괴리감만큼이나 신자들이 느끼는 또 다른 당혹감은 이 사랑 의 실천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성인들의 영웅적 사랑의 행위가 칭송받을 만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알지 만, 정작 내가 이웃에게 할 수 있는 사랑이란 너무 막막하고, 때로 작고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괴감은 아침에 눈 을 뜨면서부터 배우자와 자녀들과 마주하여 사소한 감정싸움 으로 숨이 막히는 일상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더 절실하다. '사랑하고 싶은 것'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분명다르다. 멋 진 강론이나 교훈적인 글을 읽고 내 마음이 편하고 행복해지면 누가 말려도 멋지게 사랑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막상 사랑하고 싶은 내 배우자와 가족, 가까운 친구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투 와 행동이 가슴을 내려앉게 한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내 선의를 무시하고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자괴감은 사랑과 미움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넘나들게 한다. 솔직히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지키기에 힘든 세상이다. 사람들을 만나 사랑하기보다, 혼자 자유롭게 자족하며 살고 싶 은 시대다. 이 점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일치운동을 하면서 가깝게 만나는 개신교의 목사님과 성공회 신부님들은 허심탄회한 자리에서 나한테 가끔 결혼하지 않고 사는 가톨릭 신부가 부럽다는 말을 하곤 한다. 목회활동을 하면서 신자들한 테 하는 설교와 훈계를 정작 자신의 가정 안에서 실천해야 하 는 고충을 토로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정에서 배우자를 세심히 배려한다든가, 가족 구성원의 마음을 헤아리는 삶과는 무관한 신부들은 자유롭게 본인이 편한 대로 살다가 독단과 편견에 빠 지기 쉽다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대개 사랑은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전 제한다. 하지만 진정한 이웃 사랑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보상이 아니라 행위 자체가 자신을 충만하게 하고 행복을 느낄 때 이 뤄진다. 길에 서 있는 할머니를 자동차에 태워드리거나 지하철 역에서 엎드려 구걸하는 이에게 기꺼이 지폐 한 장을 건네 주 었을 때, 아픈 사람을 위해 위로의 눈물을 함께 흘리고, 험담을 늘어놓을 때 화가 나고 속상하지만 웃는 얼굴로 받아주거나, 귀찮고 싫지만 가족 서로간의 부탁을 들어두었을 때 느끼는 것 이다. 이런 일상의 작은 행위들이 사랑인 이유는 사랑이란 말이 어 원적으로 '사람', '살다'란 단어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곧 사람답게 사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사람답다는 것은 하느님이 창조해 주신 본래 모습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우리 삶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을 마주보고 느끼고 갈망하는 그런 삶이어야 한다. 동시에 아담이 혼자가 아니라 하와와 '서 로' 마주보면서 에덴동산을 거닐던 것과 같은 삶이어야 한다. 사랑이란 결국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이웃과 함께 살면서 하느님을 참으로 갈망하는 삶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행위가 자족감에 그치지 않고, 그 모두가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깨닫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작은 사랑의 행위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주신 사랑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고백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옹 졸한 마음을 열어 이웃에게 손을 내밀고, 주저하다가 후회할지 라도 나서서 봉사하려는 마음을 갖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 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깨닫지 못하면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성 경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한다. 시인 마리아 릴케가 길에서 구걸하는 여인에게 동전이 아닌 장미 한 송이를 건네줌으로써 그 여인에게 값싼 동정보다는 이 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평생 간직할 수 있게 해주었다 는 일화가 있다. 사랑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하느님이 나를 창조해 주심에 대 해 감사하고 사랑하는 연습, 나 자신처럼 이웃을 아끼고 사랑 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투덜대지 않고 입꼬리를 내리지 않는 예쁜 마음으로 내 곁에 있는 이웃을 먼저 사랑하는 연습을 시 작해야 겠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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